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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Sep 27. 2021

1일1드로잉

회양목

#73일차

태어날 때부터 엑스트라나 조연이 되는 나무가 있다. 회양목은 화단의 울타리를 대신해 많이 심어진다. 화려하고 예쁜 주연이 되는 꽃나무 옆에 빈 공간을 채우느라 둥근 핫도그처럼 다듬어지는 나무다. 회양목은 4~5월에 꽃을 피워 먹거리 부족한 이른 봄에 꿀벌에게 좋은 식량창고가 된다. 빽빽하게 자라는 잎과 줄기 덕분에 그 사이로 작은 동물과 곤충이 숨어 지내기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눈에 띄지 않지만 실용적이고 언제나 배경이 되는 것에 익숙한 회양목의 꽃말은 "극기"와 "냉정"이다. 극기란 충동이나 욕심을 이성적인 의지로 눌러 이기는 것이며 냉정은 생각이나 행동이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침착한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회양목의 인내심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상상해본다.  


처음 교사가 되고 나서 1년이 지난 후 신규교사 추수연수라는 필수과정이 있었다. 연수 마지막 날 질문이 잊히지 않는다. 교단에 서서 아이들을 직접 만나보니 교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 것 같냐고 강사가 물었다. 20대 초중반 애기 티를 갓 벗어난 선생님들의 대답은 "인내"로 모아졌다. 그 많은 아이들의 각기 다른 욕구와 자기 말을 먼저 들어달라는 쇄도하는 요청에 하루 종일 시달리다 보면 헛것이 보이기도 한다. 반 아이들이 동시에 이야기를 해서 연못을 가득 채운 말하는 개구리로 보일 때도 있다는 선생님이 있었다. 아이들을 사랑하기로 마음먹고 학교에 왔는데 어느샌가 아이들을 탓하고 미워하는 마음도 일어나 자책하며 하루를 마치기도 한다. 매우 자세히 여러 번 설명했는데 금세 쪼르륵 나와서 방금 안내가 끝난 그 내용을 또 물어본다. 선생님의 가슴은 수없이 새긴 참을 인으로 가득해 한번 더 쓸 자리를 찾기 어렵다. 선배 선생님이 그럴 때는 가까이서 아이의 눈을 마주 보고 간단하고 분명한 말로 반복해서 이야기해주라고 했다. 저학년 몇 년 맡았더니 그게 습관이 되었다. 남동생이 지금 올케가 된 사람을 결혼 전 인사시키는 날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남동생이 내게 왜 그렇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이야기하냐고 웃겨서 혼났다고 했다.


고양이처럼 유연하고 가볍고 가만히 앉아 있는 걸 힘들어하고 폴짝폴짝 날쌔게 잘 뛰는 아이들은 문명인보다는 동물의 세계에 가까운 면이 많다. 아이들이 갖고 있는 정서적 안테나는 동물적 감각을 지녀 선생님이 자신을 좋아하는지 금방 알아차린다. 선생님이 혼내는 말이 자신을 위해 하는 쓴소리인지 선생님이 피곤하고 귀찮아서 억압하는 타박인지 구분할 수 있다. 어떤 아이들은 학교 선생님에게 부모로부터 채우지 못한 애정을 갈구한다. 자신을 알아봐 달라, 내가 어떤 느낌을 갖는지 관심을 가져달라, 아!라고 말하면 어! 하고 답해주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팔이 여러 개 달린 인도의 신이 아닌 팔 두 개짜리 선생님은 아이들의 반응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쁘게 종종거리지만 늘 충분하지 못하다. 퇴근 무렵에는 녹즙기에서 진액을 빼내고 버려지는 풀데기처럼 퍼석해져 집에가면 그대로 쓰러져버린다.


그래서 깊은 대화와 관심이 필요한 요주의 아이가 보이면 따로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상담이 잘되면 선생님과 학생의 표정이 비슷해진다고 한다. 아이가 바라는 것, 느끼고 있는 것을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알아주는 것, 어른과 아이가 감정을 주고받는 그 단순한 과정이 쌓이며 서로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지고 아이는 정서적 안정감을 느낀다. 선생님과 부모는 아이가 딛고 올라서는 발판으로 이용되어 아이들이 안정된 애착을 형성하고 건강하게 관계 맺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돕는다. 회양목과 같이 배경이 되어 주는 든든한 어른들의 울타리가 곳곳에 필요하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며 아이들이 용감하게 세상을 탐색하다 두렵거나 피곤하면 돌아와 쉴 수 있는 안전 기지가 학교와 사회에 더 많이 세워져야 한다. 학습부진, 기초학력, 영재 교육, 코딩 교육, 이제는 AI 교육도 스멀스멀 들어오고 있는 마당에 아이들의 정서적 신호를 받아주는 일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난하고 지루한 인내를 요하는 일일 것이다. 꽃 같은 아이들이 자라서 향기를 널리 퍼뜨리는 사회는 저절로 생길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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