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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Oct 09. 2021

한글을 처음 배운 기억

말의 힘

#85일차

집주인 영철이네의 옆집에 세 들어 살 때 한글을 처음 배웠다. 우리 형제는 4녀 1남, 첫째 언니부터 막내 남동생까지 나이 터울이 8살이다. 첫째 언니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우리는 한 방에서 같이 지냈다.


개량한 한옥이었던 우리 집 구조는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다. 마루를 사이에 두고 다락이 있는 큰방과 연탄창고가 붙어 있는 작은 방이 있었다. 자그마한 마당에는 수돗가와 재래식 화장실, 광이 있었고 광 위에는 옥상 겸 장독대가 있었다. 다락 아래는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있었다. 아궁이는 큰방에만 열을 날라서 작은 방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우리 오 남매는 한 여름이 아니면 대부분의 시간을 큰 방에서 같이 보냈다. TV, 라디오, 카세트, 책 등 문명의 이기가 모두 큰방에 있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추위였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부터 꽃샘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이른 봄까지 엄마, 아빠와 오 남매는 큰 방에 모여 같이 잤다.


아궁이에 가까운 구석은 장판이 타서 갈색으로 변할 정도로 뜨거웠다. 전기밥솥이 없던 시절 엄마는 보온을 위해 밥을 스텐 통에 옮겨 담아 그곳에 두었다. 메주를 띄울 때도 그 구석 위에 매달았다. 추위에 떨며 학교에서 돌아오면 큰 방의 그 구석을 찾았다. 빨갛게 트고 얼어붙은 손발을 이불속에 넣으면 금세 풀리면서 손가락 발가락에 피가 돌아 간지러웠던 기억이 난다. 너무 뜨거워 맨 살이 닿으면 델 정도라 잘 때는 양말과 긴 바지를 입어 피부를 보호해야 될 정도로 방바닥이 이글거렸다.


방의 온기는 불덩이 같은 방구석에서 멀어질수록 급격히 떨어졌다. 같은 방인데도 윗목은 마루와 마찬가지로 차갑고 웃풍이 심했다. 그 구석을 중심으로 가족 일곱이 부채꼴로 잤다. 해가 지날수록 우리는 무럭무럭 자라서 몸을 세워서 누워도 좁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엔 누구 한 사람이 양보하고 윗목에서 자야 했다. 차가운 윗목에서 자는 것을 자처한 사람은 언제나 셋째 언니였다. 신앙심 강한 셋째 언니는 지금도 아픈 부모님 곁을 가장 가까이서 지키고 있다.


나는 그 방에서 한글을 배웠다. 따로 배운 적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습득했다고 말해야 맞을 것이다. 중학교에 다니는 언니들의 대화를 곁에서 들으며 단어를 새기고 모방했다. 무엇이든 빨리 습득하고 키가 컸던 셋째 언니는 1년 먼저 학교에 들어갔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남동생이 내 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내 스스로 읽었다. 부모님은 하나뿐인 아들이 천재인 것 같다며 남동생도 학교를 일찍 보내셨다. 나는 질투가 나서 동생의 손에서 내 교과서를 빼앗아 가방에 넣고 숨겼던 기억이 난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며 작은 사회를 형성했다. 큰 방은 하나의 교실이 되었고 오 남매는 무학년제 반 아이들이었다. 우리는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표정과 목소리에 정서와 감정을 담아 전달하는 법을 생활 속에서 익혔다. 밤에도 종알종알 시끄럽게 떠들어서 영철이네 식구들이 우리 집 창문을 두드리며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준 적도 있었다. 언어 발달에 중요한 영유아 시기에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24시간 붙어 지냈으니 언어의 규칙과 문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었다. 유치원을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다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한글을 뗐다. 우리 집에서 한글을 읽고 쓰는 것은 특별한 도약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보다 우리는 누가 더 상대방을 웃길 수 있는지 경쟁했다. 슬랩스틱보다 말로 웃기는 것을 높이 평가했다. 수준 높은 유머를 구사하려고 서로의 생활 습관이나 실수, 생김새를 관찰하고 소재로 삼았다. 지금 돌아보면 유머를 연구하면서 언어 능력이 부쩍 성장한 것 같다.


한글날을 맞아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본다. 그 말을 소리내어 보고 느껴본다. 시인처럼 밟고 만지고 핥고 깨물고 맞고 터뜨려보며 말의 기운을 만끽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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