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터를 거부한 몸에 대한 반성
1일 1드로잉, 스웨터
#87일차
며칠 비가 오더니 쌀쌀해졌다. 스웨터를 입기 좋은 계절이 왔다. 카라가 있는 셔츠 위에 덧입거나 재킷 안에 입고 청바지를 입으면 가을 느낌 나는 코디가 완성된다. 스웨터가 어울리지 않는 나는 스웨터를 예쁘게 입은 사람을 보면 부럽다. 스웨터와 몸 사이에 낙낙한 공간이 그 사람을 멋스럽고 세련돼 보이게 한다. 스웨터가 잘 어울리는 사람은 말랐거나 어깨가 넓지 않다. 둘 다 해당되지 않는 내가 스웨터를 입으면 부해 보인다. 옷을 잘 입고 싶다는 욕심은 자연스레 몸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몸이 말랐거나 어깨가 적당하고 팔다리가 긴 사람은 무슨 옷이든 잘 어울린다. 문득 '몸'과 '어울린다'는 말에 물음표를 붙여본다. 이 몸은 곧 내 것이고 입는 사람은 나인데 누가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 것을 결정하는가.
수잔 웬델은 <거부당한 몸>에서 상업적인 대중매체에 물든 소비사회가 인간을 몸에 집착하도록 부추긴다고 말한다. 기업은 이윤 추구를 위해 특정한 몸을 이상화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정상적이고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몸을 가졌다고 생각하게 한다. 소비사회는 마음과 몸을 분리해서 몸의 겉모습만 강조하고 몸을 의학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우리 생활은 24시간 내내 TV, 인터넷, 신문, 영화, 라디오, CF, 버스, 지하철, 정거장, 유튜브의 광고로 둘러싸여 있다. 각종 광고는 화장품, 동안, 미백, 모발, 성형, 교정, 시술이 '자기 관리'라는 명목 하에 자연의 섭리인 노화를 거스르도록 인간의 욕망을 부채질한다.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몸을 대상화하여 영혼이 담긴 몸을 물리적인 사물처럼 대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우리 몸에서 통제될 수 없는 자신의 느낌, 본성, 무의식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근대 사회기관들이 요구하는 “온순한 몸”을 만드는 훈육방식은 근대적인 성격을 띠며 폭력적이거나 공식적 강제력 없이도 절대적인 힘을 갖고 여성의 몸을 침략한다. 신체 사이즈, 곡선, 자세, 몸짓 등 눈에 보이는 겉모습에 대한 통제가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우리 대부분에게 내면화되어 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정상성이 요구하는 것들을 매우 잘 인식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말솜씨, 감정 표현, 외모, 먹는 방법, 침, 대소변 등 몸의 기능을 조절하는 방식에 있어 정상성의 표준을 따르도록 강요된다. <거부당한 몸으로부터 떠나는 비행> 중"
4학년 아이들과 국어 시간에 한 살 때 사진을 가져와서 동시를 쓰는 수업을 준비했다. 학부모님이 보내주신 사진 속에 통통한 젖살이 보기 좋은 사랑스러운 아이가 들어있었다. 수업 전 쉬는 시간에 사진의 주인공이 내게 오더니 그 사진이 싫다고 다른 걸로 바꿔와도 되냐고 물었다. 아이는 정색하며 통통한 옛날 모습을 친구들이 아는 게 싫다고 했다. 다이어트에 대한 사회적 압박은 초등학생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삼삼오오 모여 걸그룹 댄스를 따라 하고 살찐다고 급식을 새 모이처럼 받는 여자아이들도 있다.
말도 안 되게 긴 팔다리, 깡마른 몸에 가슴과 엉덩이만 풍만한 바비인형에 대한 반성이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왜곡된 미의 기준이 자라는 아이들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막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일깨우자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미국의 한 아티스트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19세 청소년의 신체 사이즈를 통계 낸 평균치의 몸매를 가진 인형 라밀리를 만들었다. 추가 비용을 내면 지방, 주근깨, 타박상, 얼룩을 만들어주어 그 인형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을 더해준다고 한다.
인스타, 페이스북, 틱톡, 유튜브 등 시각매체를 통한 소통의 증가는 몸에 대한 과한 집착을 불러왔다. 사진이나 영상을 보정하고 필터링하는 것은 가벼운 조작에 불과하다. 자신을 이상적인 모습과 가까워지도록 값비싼 옷과 자동차, 보석, 가방을 곁에 두고 사진을 찍어 인증한다. 각종 후기와 광고, 입소문은 이상적인 몸을 가질 수 있다며 상품을 제시한다. 예전에는 연예인 사진을 들고 갔지만 요즘은 보정한 자기 사진을 가져와 똑같이 해달라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비대면 화상회의가 늘어나 화면 속 자기 얼굴을 자주 바라보게 된 까닭이다. 현대의학은 당신이 대가만 지불할 수 있다면 몸은 얼마든지 통제 가능하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물질만능 소비사회는 대중문화로 압박을 가하며 정상성의 범주를 좁혀서 많은 사람을 비정상의 영역에 머물게 한다. 가만히 있으면 가치가 떨어지는 사람으로 전락한다며 불안감을 조장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비정상의 범주 안에서 서로를 비만, 뱃살, 늘어진 엉덩이, 주름, 탈모, 여드름, 상처, 장애의 정도에 따라 차별하고 상대를 배제하는 일이 일상에 스며들어있다. 표준화된 기준에 따르지 못한 무능함과 통제하지 못했다는 불성실함으로 우리를 무가치한 사람으로 치부한다.
스웨터의 도톰한 재질과 굵은 꼬임, 털실의 보풀이 주는 따스한 느낌이 좋다. 이번 가을은 멀리했던 스웨터를 꺼내 입고 산책에 나서야겠다. 예전에 뚱뚱해 보인다고 질색하고 피했던 파스텔 색 스웨터를 한벌 장만해 가을을 지내고 나면 내 몸의 부피에 적응된 늘어진 모양에 정들 것 같다. 스웨터를 입은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이나에 신경 쓰는 대신 올 가을, 세상을 더 사랑할 수 있는데 집중하겠다.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속 화자처럼 내가 데리고 갈 하루를 세수시키고 햇볕에 잘 말린 옷을 갈아입혀 삶을 긍정하는 데 시간을 보내겠다.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이기철
나는 이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스무 번 미워했다
누군들 헌 옷이 된 생을
다림질하고 싶지 않은 사람 있으랴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돌멩이는 더 작아지고 싶어서 몸을 구르고
새들은 나뭇잎의 건반을 두드리며
귀소한다
오늘도 나는 내가 데리고 가야 할 하루를 세수시키고
햇볕에 잘 말린 옷을 갈아입힌다
어둠이 나무 그림자를 끌고 산 뒤로 사라질 때
저녁 밥 짓는 사람의 맨발이 아름답다
개울물이 필통 여는 소리를 내면
갑자기 부엌이 소란해진다
나는 저녁만큼 어둬워져서는 안 된다
남은 날 나는 또 한 번 세상을 미워할는지
아니면 어제보다 더 사랑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