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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Oct 16. 2021

자전거와 몰입

1일 1드로잉, 빵

#92일차

아버지는 시장에 갈 때 항상 자전거를 타고 갔다. 검은색의 육중한 자전거는 안장 뒤에 자전거 프레임과 같은 검은색 금속으로 된 짐받이가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쫓아가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짐받이에 앉게 해달라고 졸랐다. 나를 태운 아버지는 얼마 안 가서 시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자전거를 세우고 한마디 하셨다. "내려"


어렸을 때 여자아이들보다 남자아이들과 뛰어놀고 활달했던 나는 부모님께 자전거를 사달라고 했다. 아버지가 여자는 자전거 타면 안 된다며 단번에 거절했다. 어른이 되어 반대했던 아버지의 이유를 생각해보니 민망해졌던 기억이 난다. 성인이 되어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전거를 배운 것이다. 무작정 저렴한 생활자전거 한대를 마련하고 큰 형부에게 가르쳐달라고 했다. 어스름한 저녁,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형부와 만나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반시간도 안 걸려 자전거 타는 요령을 익히자 형부는 처제의 균형감각에 감탄했다. 학교 운동장에 들어갈 때는 끌고 걸어갔으나 집에 돌아올 때는 자전거를 타고 왔다. 나는 노력파인 줄 알았는데 내게도 이런 천부적인 재능이 있구나 싶었다. 오랜 시간 동경하는 마음으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만 마주치면 유심히 관찰한 효과가 아닐까 싶다.


그 후 인터넷으로 자전거 동호회에 가입했다. 며칠 후 동호회 게시판에서 가까운 하늘 공원에서 야간 번개(그때는 '벙개'라고 했다)를 한다는 공지를 보았다. 당시 한일월드컵을 준비하면서 월드컵경기장이 이제 막 지어진 때라 하늘공원은 인적이 없었고 공원 정상까지 아스팔트 도로가 정비되어 있었다. 젊은 남녀들이 언덕 아래 모여 닉네임을 말하는 것으로 자기소개를 마치고 곧바로 정상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관리사무소는 이용객이 없는 밤에 가로등을 꺼놓았으므로 거친 호흡소리로 서로를 확인할 정도로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웠다. 경사가 높아지며 기어가 낮은 내 생활 자전거로 언덕을 오르는(자전거 용어로 '업힐')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엉덩이를 들어 올려 페달에 체중을 싣느라 핸들이 이리저리 뒤틀렸다.


날숨이 터져 나오고 허벅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참으며 정상에 도달했다. 먼저 도착해 한참 기다렸던 실력자들이 그 자전거로 왔으면 잘한 거라며 박수를 쳐주었다. 자전거 안장에서 내려오지 않고 끝까지 타고 올랐다는 성취감에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차가운 밤공기가 몸의 열기를 식혀주었고 주황색 성산대교를 따라 빛나는 불빛이 수놓은 야경은 꿀맛 같은 보상이 되어주었다. 라이딩 후 마시는 물 한 모금은 새로운 가치를 느끼게 해 주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고 잠자리에 들자 몸이 방바닥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온몸이 근육통으로 몸살을 앓는데 마음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그날 밤 이상한 방식으로 충족된 욕구로 내가 비정상인가 싶었고 가슴이 뛰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는 교단에 선지 얼마 안 되어 우리 반 아이들이 귀한 줄 모르고 단순한 직장인의 마음으로 학교를 출퇴근했었다. 교사라는 직업은 학생을 바람직하게 전인적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는 목표는 방대하지만 담임을 맡은 1년 안에 학생의 뚜렷한 변화를 확인할 수 없으니 결과도 보이지 않는다. 일에서 의욕과 집중력을 잃으면서 부유하는 마음이 자전거의 맛을 보자 갈증을 해결할 샘물을 발견한 조난자처럼 불꽃이 일었다.


친구들이 월급을 모아 유럽 배낭여행을 갈 때 나는 그 돈으로 MTB(Mountain Terrain Bike. 산악용 자전거)를 샀다. 4대강도 없었고 자전거도로도 따로 없었던 때였다. 동호회 형님들을 따라다니며 등산객으로도 다니지 못했던 강원도의 큰 산을 자전거로 넘었다. 남산 팔각정은 시시했고 며칠을 준비해서 한계령, 미시령도 (자전거로 한 번도 내리지 않고!) 넘었다. 핸드폰 내비게이션 기능이 없을 때라 지도를 펼쳐 내가 간 길을 형광펜으로 표시하며 다녔다. 자전거에 달아놓은 속도계가 최고 기록, 누적 거리를 갱신할수록 체력의 한계도 돌파했다. 주중에는 단조롭고 희미했던 일상이 주말에 대자연 속에서 거친 라이딩 생활로 스펙터클 해졌다. MTB 라이딩은 살아있다는 느낌,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무이 한 존재라는 느낌을 갖게 해 주었다. 깊은 산속을 자전거로 다니는 모험을 통해 몰입감을 느꼈고 환희를 맛보았다.


니체는 <방랑자와 그 그림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방면에서의 다양한 체험이 사람을 한층 현명하게 만든다. 따라서 살면서 체험하는 모든 일들이 유익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무엇인가 체험하고 있을 때는 완전히 몰두해야 한다... 중도에 체험하는 일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그러면 전체를 마음껏 차분하게 집중할 수 없다. 반성이나 관찰은 그 뒤에 오는 것으로, 이때 비로소 새로운 지혜가 생산되는 것이다. "


내게 MTB는 완전한 몰두와 차분하게 집중하는 마음을 경험하게 해 준 최고의 여가생활이었다.


자전거 탈 때 간식으로 많이 먹었던 열량높은 소세지빵을 그리고 류시화의 <빵>을 읽었다.

지나간 아픔은 여물지 않은 어린 내 감정을 성숙하게 만든 바람이었구나. 아집으로 편협한 마음을 밀가루처럼 분쇄해준 고마운 일이었구나. 자기만 생각하느라 한쪽으로 치우쳐 제대로 익지 못한 나. 과거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나는 속까지 잘 구워진 빵을 닮아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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