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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Oct 26. 2021

오늘의 조율

1일 1드로잉, 라디오

#101일차

떠나는 가을이 아쉬워 아이들과 야외수업을 나갔다. 햇살이 좋은 시간대인 3, 4교시에 운동장 한편에 놓인 피크닉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햇빛이 비치는 곳은 따뜻한데 테이블이 놓여 있는 그늘은 여지없이 쌀쌀했다. 간단한 드로잉을 하고 글을 쓰는 활동이었는데 아이들의 글 속에 추위, 찬 바람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할 수만 있다면 테이블을 들어서 가을 햇빛이 쏟아지는 운동장 가운데로 옮기고 싶었다. 어지간히 하고 나머지는 교실에서 마무리하자 정하고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겨 돌아왔다. 아이들은 따뜻한 실내로 들어오자 몸이 노곤하여 졸리다고 했다. 교실에서 담요를 덮고 낮잠을 자면 어떨까? 아이들이 다 같이 자고 일어나 그 경험을 글로 쓴다면? 내가 밴드에서 하고 있는 10분 글쓰기를 조금 바꿔서 아이들과 함께 해보고 싶다. 신나게 운동장에서 체육하고 교실로 돌아와 10분 동안 글을 쓰는 것이다. 어느 비 오는 날 아침엔 교실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비에 대해 10분 글쓰기를 한다. 이어서 둥글게 앉아서 돌아가며 자기 글을 낭독하는 것이다. 예쁜 공책을 한 권씩 선물해 글 쓰는 시간만 주어도 아이들의 마음이 무럭무럭 자랄 것 같다.


양쪽이 통해야 시원한 공간에 한쪽 문이 닫힌 것처럼 답답한 하루를 보냈다. 아침마다 하는 명상에서 오늘의 성찰 질문이 "강렬한 감정이 들 때 당신은 어떻게 대처하나요?"였다. 나는 창 밖에 먼 풍경을 바라보거나 하늘을 오래 올려다본다, 호흡을 하거나 오래 걷기를 한다고 적었다. 아침의 명상이 무색하게 퇴근 무렵에는 나도 모르게 짙은 실망감에 휩싸였다. 마음이 뒤죽박죽 된 것 같고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서 낭패감이 들었다. 마음을 돌이키는 지점을 어느 틈에서 찾아야 하는지, 생각의 방향을 틀기 위해 결단을 내릴 힘도 없었다. 멍하게 있으니 바닷가에 서 있다가 밀려오는 파도에 계속 부딪쳐 바짓단이 젖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점점 젖은 부위가 올라오며 옷이 무거워지는데 두 다리는 움직일 줄 모른다. 그대로 추위에 떨며 몸이 굳어버리기 전에 마음의 보호막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맹수를 포함한 모든 동물의 새끼는 왜 귀여울까?라는 흥미로운 주제의 다큐를 본 적 있다. 결론은 생존 전략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자신의 안전을 책임져 줄 어른이 필요하므로 자신을 보호해주는 부모와 친밀함, 애착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은 생물학적 본능이다. 부모는 아기를 안아주며 아기의 비언어적인 표현-울음소리, 표정, 목소리 톤에 즉각 반응하고 의미를 읽어낸다. 침착하게 아기의 요구에 대응해주고 곁에서 함께 해줄 때 아기는 안전감을 느낀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을 느끼며 타인을 대하는 의사소통 기술을 얻게 된다. 부모가 아기에게 집중하며 정서적 신체적 반응을 잘 맞추면 아이는 타인과의 연결에서 위안을 느끼고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는 "직감"을 얻는다. 애착 이론 책에서는 직감을 gut feeling이라고 했다. 뇌와 장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감각은 소화기관에 강한 영향을 준다. 불안이나 두려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면 위에 경련이 일어나거나 구토하고 싶은 경우가 그렇다. 아이들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맺는 정서적 상호작용은 내장(gut)이 느끼는 감각으로 남아 아이의 성장 발달에 깊은 영향을 준다.


아이가 불안과 공포, 고통을 전달하면 부모도 아이의 정서에 공감하며 처음엔 같이 불안해한다. 얼마 안 지나 부모는 어른으로서 침착하게 자신의 불안과 고통을 처리한 뒤 아이를 토닥여주고 곧 괜찮아질 것이라며 달래준다. 아이를 진정시키고 함께 대안을 찾아주는 것을 담아내기 container라고 한다. 부모가 자신의 정서 받아 담아내는 과정을 본 아이는 이를 내면화하여 자신의 충동과 정서를 잘 조절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된다.  


다니엘 스턴은 부모와 자녀가 서로 잘 맞춰진 감정 상태를 정서적 조율 affect attunement이라고 개념화했다. 라디오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 최적의 상태를 향해 조율하듯이 부모와 자녀가 서로에게 잘 맞춰져 있으면 아이의 집중력은 증폭되고 인간으로서 성장이 놀라울 정도로 일어난다. 자신이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생기며 타인과 주고받는 관계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협력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어튠먼트가 이루어진 아이는 자라서 자신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잘 처리할 줄 아는 능력을 어른이 된다. 그런 아이는 타인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감정교류를 자연스럽게 이뤄 안정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크다.


학교에서 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갈등으로 힘든 아이를 보면 부모와의 관계를 헤아려보게 된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어튠먼트가 잘 맞춰졌다면 아이들이 친구를 만나며 즐거운 흥분으로 밝게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아쉬움이 든다. 부모와의 애착관계는 어른이 되어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오늘 저녁 내 마음에 찾아온 실망과 낭패감이라는 손님은 어디서 왔을까? 모래사장에 다리가 푹 빠진 것처럼 그 손님 앞에서 나는 왜 꼼짝하지 못했을까?


불면증은 아니지만 쉽게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는 밤이면 라디오의 도움을 받는다. 다이얼을 손으로 돌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아날로그 탁상 라디오를 갖고 있다. 다이얼을 확확 돌릴 때마다 앞의 방송과 뒤의 방송이 뒤섞인 소리의 혼합물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탁한 소리가 맑아지는 구간에 들어서면 미세한 차이에 집중한다. 다이얼을 세심히 움직여 드디어 최적의 상태를 조율하는 데 성공한다. 그럴 때면 외투 깃을 여미며 혹독한 바람을 뚫고 안온한 집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안정감이 느껴진다. 버튼을 누르면 거짓말같이 맨질맨질한 음질의 방송만 순간 이동하는 디지털의 간편함보다 다이얼을 돌리는 수고로움이 주는 감성이 좋다. 쓸데없는 잡음으로 가득했던 오늘의 시간이 반드시 올, 깨끗한 음질의 어느 날을 찾아가는 여정의 하루로 다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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