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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Oct 24. 2021

삶이라는 옷감

1일 1드로잉, 일력

#100일차

오늘로 그림을 그리고 시를 필사하고 글을 쓴 지 100일째 되는 날이다. 매일 저녁,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을 치르듯 그날 발견한 식물이나 의미를 지닌 사물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림 초보자로서 호기심에 이끌려 선 긋고 색칠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결과에 대한 기대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니 재미있었다.


오늘까지 100편의 시도 필사했다. 그림에 어울리는 시를 골랐던 걸 생각하면 읽은 시는 300편이 넘는다. 마음에 드는 시를 읽으면 시인의 삶이 궁금해진다. 흥미로운 인간들이 살고 있는 지구가 매력 있는 곳으로 다가다. 오늘 100번째 시는 유현주의 <나도 그런 날이 있다>. 웃고 다닌다고, 밝은 옷을 입었다고 살만하고 즐거워서가 아니지. 주저앉아 울고 싶은 날이면 더 큰 소리로 노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강의 꿈이 바다로 가는 것처럼 나 또한 그런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날 위해 지친 마음을 쓰다듬으며 오늘 하루를 마감한다.    


오늘 아침엔 내 마음에 사는 두 마리의 늑대 중 흉악하고 남 탓하고 절망하는 늑대에게 먹이를 주었다. 순식간에 마음이 어두워지고 꺼림칙한 느낌으로 남았던 일들이 모두 부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정오가 되기 전 집을 나서서 무작정 걸었다. 가을빛으로 더워져 겉옷을 벗었더니 시원한 바람에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발길은 어느새 코로나19 전에 갔었던 오래된 중식당을 향했고 우리 둘은 유린기와 짬뽕을 먹고 나왔다. 따뜻한 라테를 마신 뒤 서점에 가서 책을 구경했다. <수영 교본>과 <월간생활도구>를 구입해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거친 늑대의 몸부림이 잠잠해지고 마음이 균형을 찾은 것을 느꼈다.  


침대에 누워 머리맡에 둔 스탠드를 켜고 <내 어머니 이야기>를 자기 전에 조금씩 읽었다. 지난 추석 즈음 읽기 시작해서 어젯밤 마지막 장을 덮었다. 마지막 4권은 딸의 이야기다. 만화가와 가족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그림과 글로 펼쳐졌다. 평생 노름과 알코올 문제, 가정폭력을 행사해온 아버지를 XXX라고 부르는 장면이나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는 문제로 형제들이 서로를 X 년, XX놈으로 부르며 반목하고 대립하는 모습이 끊어진 조각으로 그려졌다. 곁에서 싸움 구경하는 것처럼 한 컷 한 컷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는데 마음이 저리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했다. 다행인 건 우리 집만 저렇게 싸우는 게 아니구나, 그래도 우리 집은 욕은 안 하니까 좀 나은 것 같다는 얍삽함이었다. 마음이 아픈 건 6.25 전쟁 후 굶주림과 질병, 개망나니 남편 대신 생계를 이어가라 남에게 돈 빌리고 장사하며 고생했던 작가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초로의 어머니 앞에서 서로의 마음을 할퀴며 싸우는 자식들 모습이 슬펐다. 심각한 다툼의 단면을 그대로 담은 것을 보면 아마도 만화가의 형제들이 자신의 책을 영영 안 읽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만화가는 대학시절 6월 민주항쟁을 거쳐 공장에 위장 취업했다 붙잡혀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력이 있다. 만화는 노동운동에 매달렸던 대학시절, 술과 담배를 의지하며 몸이 상했던 일,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와 자기애 문제로 힘들었던 지난날, 만화가로 진로를 정하게 된 과정 등 자신의 삶을 담았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8년간 이 책에 매달린 소회를 밝히는 부분을 읽고 가슴이 먹먹해져서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방황했던 삶의 진솔한 이야기는 눈물 흘리며 잠 못 드는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해준다. 그런 날만 있는 게 아니라며, 살다 보면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용기를 준다.   


오늘 누군가는 마음을 나누고 싶어 핸드폰 연락처를 위아래로 넘겼지만 한 사람도 건지지 못해 쓸쓸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누군가는 놓쳐버린 호스처럼 물줄기가 사방으로 튀어 엉망진창이 된 정신없는 하루였을 것이다. 이런 오늘, 저런 오늘이 씨실과 날실처럼 만나고 헤어지며 인생이라는 옷감을 만든다. 같은 사건인데 스무 살에는 거뭇하게 보였던 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 푸르게 보일 때도 있었다. 삶의 의외성을 믿고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겸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삶을 단단하게 직조한다. 삶에서 부딪치는 어려운 고비는 특별한 고운 무늬를 이루며 내 삶을 유일무이하게 만드는 조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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