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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Oct 23. 2021

그런 사과 말고요.

1일 1드로잉, 사과day

#99일차

10월 24일은 사과day다. 둘(2) 이서 사(4)이 좋게 지내기 위해 사과를 건네며 사과하는 날로 10년 전쯤 시민단체에서 만든 날이다. 이맘때 사과가 제철이라 사과 판매를 독려하는 효과도 있고 먹는 '사과'와 용서와 화해를 뜻하는 '사과'가 동음인 것에 착안했다고 한다. 해마다 학교는 생활부 주관으로 10월 24일 전후로 애플데이 주간을 정해 사과 모양 편지지를 나눠주며 사과할 일이 있는 친구에게 편지 쓰는 행사를 벌인다. 그러다 보면 "저는 사과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요?" 하는 아이들이 나온다. 마음은 전혀 사과할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 쓰라고 하니 대충 쓰는 아이들도 있고 편지로 받은 사과 정도로는 마음을 풀고 싶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 대개 이런 활동이 그렇듯 억지 사과와 가짜 용서를 일으킬 수 있는 역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


사과day에 사과를 안 하거나 안 받아주면 나쁜 사람이 되어 죄책감이 들게 하는 건 교육이 아니다. 솔직한 감정을 숨기고 남에게 맞춰야 하는 비굴함을 느끼는 폭력적인 날이 될 수 있다. 이를 예방하려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고 배려하는 사회적 기술,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 효과적으로 원하는 것을 전달하는 의사소통방법을 익히는 과정이 함께 해야 한다.


요즘 한 달에 한 번씩 관심단(관계 심리학을 연구하는 교사 연구단) 모임에서 김현수 선생님과 공감 수업과 SEL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미국은 1990년대 후반 청소년 사이의 폭력과 총기사고, 마약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다. 성과와 업적 중심의 미국 사회는 이에 대한 반성으로 새로운 교육을 요구하게 되었고 예일 대학 연구팀은 사회적 관계과 정서 관리를 배우는 사회정서학습(social and emotional learning, SEL)을 개발하였다. SEL은 내가 나 자신과 관계 맺는 법, 나와 타인이 관계를 형성하고 팀워크를 만드는 방법,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 현명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등을 배우는 프로그램이다.


예일대학의 SEL은 덴마크의 공감교육을 모델로 연구되었다. 덴마크는 공교육 기관에서 일주일에 1시간씩 공감 수업을 진행한다. 1993년부터 시작된 이 수업을 통해 덴마크 청소년들은 6세에서 16세가 될 때까지 10년간 공감능력을 키우게 된다. 초등학교 때는 인지과학적으로 정교하게 연구된 감정카드 교구로 감정에 대해 집중적으로 배운다. CAT-KIT 프로그램은 원래 자폐학생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초등학교에 보급되었다. 초등학생들은 카드에 그려진 얼굴 표정을 보고 감정을 읽는 연습을 반복하여 자연스럽게 감정을 익힌다. 감정카드로 감정을 개념화하는 수업을 통해 두려움이나 수치심이 뭐냐고 물으면 자기 나름의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등교하면 매일 자신의 감정을 파악하고 감정을 색깔과 연결 짓거나 감정의 정도를 숫자로 표시해서 기록하고 결과를 누적, 통계화하여 활용하기도 한다. 중학생이 되면 함께 의견을 나누고 문제를 해결하는 연습을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생인 14-16세에는 공감 수업시간에 요리 레시피를 나눈다. 집집마다 전해오는 케이크나 쿠키 요리법을 소개하며 그 집단의 관계망, 커뮤니티에 결속되는 소속감을 경험한다. 보통 새로운 학년에 올라가는 첫 시간에 의례적으로 자기소개나 가족 소개를 하는데 덴마크는 공감 수업의 마지막 단계인 고등학생 때 자기 자신과 가족을 소개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직 친밀감이 형성되지 않은 선생님과 아이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건 무척 어색해서 형식적으로 이뤄지기 쉬운게 사실이다.


덴마크에는 메리 고든 선생님의 <공감의 뿌리> 프로그램도 있다. <공감의 뿌리>는 엄마와 갓난아기를 교실로 초대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수업이다. 이 시간에 아이들은 책상을 치우고 교실 가운데에 둥글게 앉는다. 아기 엄마는 아이들과 인사를 나눈 뒤 바닥에 깔아 둔 따뜻한 담요 위에 아기를 내려놓는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그동안 아기가 잘 지냈는지, 얼마나 웃었는지, 뒤집기에 성공했는지, 이가 났는지, 무엇을 먹는지, 아기를 키우며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등 궁금한 것을 묻는다. 수년간 꾸준히 지속되는 <공감의 뿌리> 시간을 통해 아이들은 아기의 성장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책임과 기쁨을 배운다. 자신과 그 아기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하고 아기의 발달 과정과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말 못 하는 아기의 표정과 울음소리, 아기의 몸짓 등 비언어적 표현을 보며 감정을 읽는 훈련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학생들은 이 수업으로 수학, 과학, 읽기 등 분과 학문으로 배울 수 없는 감성능력, 진실한 대화, 인간애를 경험하고 성숙해진다. 학교를 방문해 초등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아기 엄마도 고된 육아의 외로움이나 우울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내 감정을 잘 알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공감능력이 학교교육을 통해 길러졌다는 것, 그 결과 1980년대 자살률 1위였던 덴마크가 지금은 행복지수 1위로 탈바꿈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10월 24일 사과day 이벤트보다 일주일에 1시간씩 10년간 꾸준히 진행되는 공감 수업이 우리의 공교육 커리큘럼에도 들어와야 한다.


우리나라는 사회적 참사가 일어나면 뒤늦게 대책을 들고 나온다. 사회 제도나 구조를 바꾸는 것은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지난한 협의가 필요하다. 정권유지나 신경 쓰는 인간들이 내놓는 대책이란 학교에 의무교육시수를 늘리는 것이다. 현장의 교사들은 수많은 교육이 동시에 진행되는 마술을 부리는 교육과정을 짜야한다. 국어시간에 안전사고에 관한 글을 읽고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면 국어 성취기준 도달과 안전교육을 했다고 치는 것이다. 공감 수업이나 SEL은 관심 있는 선생님을 만났을 때나 겨우 몇 명 학생에게 적용되는 방식으로 실천된다. 코로나19 재난이 학생들의 정서와 사고에 어떤 그림자를 남겼을지 걱정되는 지금 공감 수업과 SEL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와 합의가 이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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