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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Oct 31. 2021

첫 차와 막차

1일 1드로잉, 표고 배지

*2021.10.31. 10분 글쓰기*

새벽 첫 차, 심야 막차


새벽 첫 차를 떠올리니 인도에 성지순례 갔던 일이 생각난다. 순례단이 인천공항에서 모이기로 한 시각은 아침 7시였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참가자는 서울에서 1박을 해야 가능한 시간이었다. 다행히 서울이 집인 나는 인천공항까지 동선을 체크하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음 날을 기다렸다. 새벽 첫 버스를 타고 공항 리무진이 서는 정거장에서 내렸다. 첫 버스는 요금을 할인해준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새벽 5시 40분 버스 중앙 정거장에는 광고판의 하얀 불빛만이 검은 도로를 밝히고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싸늘하고 사방이 어둑해 앞으로 있을 성지순례의 고난이 짐작되는 듯했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가 붉은 후미등의 빛 번짐을 남길 때마다 바닥의 고인 빗물이 내게로 덤빌 듯이 튀어올랐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며 의지할 친구이라도 되는 냥 캐리어를 끌어안고 리무진이 오기만 기다렸다. 그때 양복 입은 술 취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와 내 옆에 앉았다. 술이 떡이 되게 취한 그 남자는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일어나더니 허리띠를 풀고 바지춤을 내려 그대로 노상방뇨를 시작했다. 일자로 쭉 뻗은 정거장은 외나무다리처럼 갈 곳이 없었다. 나는 서둘러 캐리어를 끌고 정거장 연석이 세모로 만나지는 곳까지 피신했다.  


그사이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였고 사이에 열명 정도로 늘었다. 그중에는 하늘색 유니폼에 머리를 올백으로 단정히 묶은 승무원도 있었다. 늘어난 사람들은 뜨내기인 나와 달리 인천공항을 자주 이용해 리무진의 정확한 도착시각에 맞춰 나온 모양이었다. 아까의 취객은 쓰러질 듯 말 듯 횡단보도를 건너더니 사라졌고 잠시 후 앞 유리에 인천과 서울이 크게 쓰인 버스가 들어섰다. 푸식- 리무진 버스는 정류장 맨 앞에 가서 방귀소리를 내며 섰다. 앞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갔지만 버스기사는 하얀 손을 저으며 만차라서 못 탄다고 알렸다. 영종도 가는 버스는 리무진 밖에 없는데 어쩌란 말인지, 다음 배차 간격은 너무 길었고 택시를 타야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이 버스를 못 타면 비행기를 놓쳐 보름간의 일정이 날아가게 생겼다. 머릿속은 출발시각을 아침 7시로 정한 기획자를 탓하고 왜 그때 이의제기를 못했는지 한탄하는 헛수고로 바빴다. 버스를 놓친 십여 명의 눈초리가 일제히 승무원을 향했다. 그런 일은 드물었는지 승무원도 당황해하며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뒤에 오는 일반버스를 잡아탔다. 졸지에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 승무원을 따라 나를 포함한 십여 명은 황급히 올라탔고 다른 정거장에서 공항리무진을 타고 제시간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심야 막차는 재수하던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친구들이 새내기 대학생이 되어 풋풋한 스무 살을 즐길 때 나는 스스로를 실패자로 낙인찍고 좁고 답답한 독서실에서 스무 살을 보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 재수를 한다는 것에 죄책감이 심했다. 매일 일등으로 독서실에 도착해 전등을 켜고 마지막에 독서실 문을 닫고 나왔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부부가 운영했던 그곳은 다른 독서실보다 깨끗했고 이용요금이 쌌다. 집에서 멀어도 그 독서실을 다닌 이유는 저렴한 비용도 있지만 늦은 밤 집에 올 때 봉고차로 데려다주는 셔틀버스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주인아저씨는 밤 9시부터 12시 사이에 한 시간마다 셔틀버스를 운영했고 나는 언제나 막차를 탔다. 마지막 셔틀의 고정 승객은 나 하나였고 다른 학생은 한 두 명 있다 없다 했다. 봉고차의 가운데 좌석은 양쪽이 마주 보게 되어 있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친분 없는 아이들이 서로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아 눈길을 피하는 것이 영 불편했다. 재수 시절의 나는 교복 입은 아이들을 보면 낙오자의 기분이 상기되고 한 살이라도 어린애들과 경쟁한다는 것이 창피해서 좀처럼 얼굴을 들지 못하고 다녔다. 가운데 자리보다 앞만 보는 운전석 옆자리가 편하다 보니 막차의 보조석은 내 전용 자리가 되었다. 아저씨는 가까운 학생들을 데려다준 뒤 독서실에서 가장 우리 집을 마지막으로 향했다. 셔틀버스의 마지막 손님이었던 나는 매일 말수 없는 주인아저씨와 나란히 앉아 심야 라디오를 들으며 집에 왔다.


언제나 아침 일찍 오고 막차를 타고 가는 모습이 성실해 보였는지 주인 부부는 내게 독서실 총무 자리를 제안했다. 총무란 교회 예배에 가는 주인 부부를 대신해 일요일에만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독서실 안내 데스크를 지키는 일이었다. 일요일은 독서실을 등록하러 오는 사람이 드물었고 요금이나 운영시간을 문의하는 전화가 한두 번 올 뿐이었다. 아르바이트비는 독서실비와 같았고 거기 앉아서 공부해도 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안내실 옆은 휴게실이었는데 남자 고등학생들이 TV에서 생리대 광고를 보고 비누 광고로 착각해서 서로 맞다 아니다 싸우는 소리에 혼자 키득거리며 웃었던 일도 있었다.


선배들의 환영을 받으며 대성리로 엠티 가고 미팅을 하고 연애하는 또래들이 환한 꽃 시절을 보낸 것과 대비되게 재수학원과 독서실만 시계추처럼 오갔던 나의 스무 살은 무겁고 침울한 그늘이 드리운 시간이었다. 재수는 내가 선택한 일이었으니 좀 가볍게 받아들여도 진지함을 잃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목에 칼을 찬 조선시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고 대기자 명단의 가망 없는 순서에 내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고 영원한 끝을 의미하는 마침표가 찍힌 것처럼 절망했었다. 돌아오기 힘든 유배지에 갇힌 버려진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토록 열심히 공부했고 수능 전날 밤 불면증에 시달려 한 잠도 못 자고 시험 봐서 뜻대로 안 된 불쌍하고 위로받아야 할 나에게 대체 무슨 형벌이란 것인지 스스로에게 따져 묻지 못했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그때의 마침표는 쉼표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끝이 정해진 인생인데 힘들 때마다 쉼표를 찍어가도 괜찮은 거 아닌가 싶다. 때로는 그 당시의 내가 마침표를 찍은 것어어도 좋았다. 마침표로 끝난 다음 새로운 문장,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음을 의미하니까.


독서실 내 자리에 전등을 켜고 앉으면 안온함이 찾아왔다. 한 번도 내방을 가져보지 못했던 나는 칸막이 쳐진 독서실 책상이 유일한 나만의 공간이었다. 독서실 양옆과 막힌 앞면을 벽 삼아 인테리어 하듯이 몇 권의 책과 연필꽂이, 계획표, 목표와 명언을 적은 포스트잇을 나름의 질서를 정해 꾸미는 재미가 있었다. 책상에 항상 보이게 꺼내놓는 책은 인생의 지침서로 삼을만한 책으로 심사숙고해서 골랐다. 감동받은 책을 선정해 나만의 명예의 전당에 모시는 것이다. 모의고사 성적이 목표한 대로 나오면 보상을 주듯이 참고서 외에 다른 책을 읽었다.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공부시간과 쉬는 시간을 나눠 틈틈이 소설책을 읽었다. 그때 읽은 책의 작가들이 대학에 들어와 보니 정치적으로 이쪽과 저쪽 가운데 저쪽에 해당하는 책들이라 실망했던 기억도 난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3년보다 재수했던 1년 동안 부쩍 성숙함을 느꼈고 대학과 학과를 정하며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혼자만의 고립된 시간을 보내며 그 어떤 어려운 일이 와도 견딜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자라났다. 재수를 앞두고 고민하는 지인의 자녀나 제자들이 있으면 그 시절이 고통과 후회로 점철되지만은 않는다는 경험담을 들려주고 있다.


지금 돌아보면 독서실 주인 부부가 어렵게 공부하는 나를 위해 일자리를 일부러 만들어 준 게 아닌가 다. 일요일에 독서실 문의하러 오는 이도 거의 없었고 누가 와안내실에 사람이 없으면 나중에 다시 오면 되었다. 한 달에 네댓 번 하는 총무일로 한 달치 독서실비를 감면해주는 것을 그때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학생들이 모두 귀가해야 문을 닫을 수 있었던 독서실에서 부부는 매일 자정까지 혼자 남은 나를 데려다주러 한 시간을 기다려주었다. 매일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책상에 엎드려 침 흘리고 자느라 버스 타러 내려오지 않아서 아주머니가 깨우러 온 적도 있었다. 입이 커다랗던 아저씨는 하품을 쩍 벌어지게 하고 운전할 때 졸리다고 히터를 켜지 않고 손을 비비며 운전했었는데 그 나이의 주변머리로는 수고로움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음 해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던 건 그런 어른들의 넉넉한 배려와 말 없는 격려 덕분이었다. 합정역에 있었던 그 독서실은 진즉에 없어졌고 주인 부부의 인상 좋은 얼굴만 내 기억에 남아있다. 성공해서 찾아뵙겠다고 생각해서 대학을 입학할 때나 졸업한 뒤에도 인사하러 못 가고 보답을 미루고 살았다. 성공이다, 아니다 말하기 힘든 교사가 된 나는 다가올 인연을 놓치지 않고 감사한 일은 그때그때 갚으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림이야기.

표고배지에서 3일만에 버섯이 저렇게 자랐다. 조금 징그럽지만 균이 자라는 생명활동이라 의미있었다.  

오늘은 10월의 마침표를 찍는 날이다.

내일부터 쓰여질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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