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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Nov 02. 2021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까운 달

1일 1드로잉,  생고구마

#109일차

*2021.11.2. 10분 글쓰기*

11월에 어울리는 시, 글, 그림...


오래전 <늦어도 11월에는>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제목이 가진 힘으로 11월만 되면 그 책이 생각난다. 앞에 붙은 '늦어도'라는 말이 11월에 어울린다. 달력 한 장 만을 뒤에 남겨둔 11월의 스산한 느낌을 잘 살려준다. 우연히 만난 작가 베르톨트에 첫눈에 반해 막대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집을 나간 유부녀의 내면 심리에 관한 이야기다. 시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남편도 받아주지만 마리안네의 심경은 혼란스럽다. 그녀가 사는 도시에서 베르톨트의 연극 <늦어도 11월에는>이 초연될 예정이다. 충격적인 엔딩 장면이 주는 쓸쓸한 여운이나 한동안 마음에 남는 비련의 주인공들이 외롭고 적적한 11월의 이미지를 상승시킨다.


11월은 요절한 천재 작가 전혜린이 생각나는 달이다.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를 읽고 이상을 향한 열정과 자기 삶을 주도하는 에너지에 감동받았다. 나 또한 꿈 없이 평범하게 살지 않겠다고 일기장 한 구석에 새기며 다짐했었다. 11월은 전혜린이 번역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주인공 니나도 생각나게 한다. 감수성 풍부하고 독립심이 자라나기 시작할 무렵 받은 지적 정서적 자극은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고등학생 때 읽은 <생의 한가운데>에서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자기 삶을 이끌어가는 니나처럼 강한 의지를 갖고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꿈꾸는 자아상을 잊지 않으려고 이메일 아이디를 전부 nina로 만들었다. 영어학원 다닐 때 닉네임을 정하라는 말에 망설임 없이 Nina로 했었다.


11월 늦가을에 접어들면 남자 성악가의 노래가 간절하게 들린다. 그중에서 바리톤의 낮은 음색과 무게감 있는 음역대가 마음을 떨리게 하고 먹먹한 감동을 전해준다. <별을 캐는 밤>은 11월 깊은 밤에 잘 어울리는 노래다.


<별을 캐는 밤>

심응문 시, 정애련 곡


오늘 같은 밤에는

호미 하나 들고서

저 하늘의 별밭으로 가

점점이 성근 별들을 캐어

불 꺼진 그대의 창 밝혀주고 싶어라

초저녁 나의 별을 가운데 놓고

은하수 많은 별로 안개 꽃다발 만들어 만들어

내 그대의 창에 기대어 놓으리라.

창이 훤해지거든 그대,

내가 온 줄 아시라

오늘 같은 밤에는

호미 하나 들고서

저 하늘의 별밭으로 가

점점이 성근 별들을 캐어

불 꺼진 그대의 창 밝혀주고 싶어라

초저녁 나의 별을 가운데 놓고

은하수 많은 별로 안개 꽃다발 만들어 만들어

내 그대의 창에 기대어 놓으리라.

창이 훤해지거든 그대,

내가 온 줄 아시라

내가 온 줄 아시라


https://youtu.be/6 hh77 K64 ciQ


11월은 인디언 부족마다 여러 가지 다른 심상을 남기는 달이다. 체로키 족에게 11월은 '산책하기 좋은 달', 키오와 족에겐 '기러기가 날아가는 달', 아라파호 족에겐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다. 오늘 정진규의 시를 읽고 11월에 새로운 별칭이 생각났다. 11월은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까운 달'이다. 11월은 모든 것이 망각의 강에 빠져 검은 물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아직 따뜻한 볕이 남아있는 달이다. 해마다 달력이 한 두장 남을 때면 아이들에게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라고 이야기해준다. 코로나19로 힘들게 학교를 다니고 친구도 마음껏 못 사귀고 기댈 곳 없는 마음에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아쉬웠던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 남은 시간 동안 어린이의 광기를 드러내며 신나게 놀고 뜨거운 열정을 발산해보자. 서로에게 따뜻하게 스며들고 함께 멋진 것을 만들어가자. 사라져 가는 2021년을 맥없이 바라보고 있기엔 11월의 햇볕이 아깝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정진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 날

농사꾼 아우가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그림이야기

생고구마를 그리고 시를 따라 쓰며 채우는 오늘의 페이지.


선생님들과 저녁을 먹으며 내 앞에 앉은 선생님이 말할 때

가만히 존재와 침묵으로 듣고 말 속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해봤다.

대화할 때 상대가 이제 막 가슴에서 구성되어 나오는 의식을 정리할 수 있도록

잘 들어주며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상상을 했다.


집에 돌아와 지금 내 주변을 둘러본다.

눈길을 따라가며 사물 하나하나 가만히 따스한 눈으로 보려고 시도한다.

편안하고 쉼이 있는 곳, 나를 보호해줘서 고마운 공간이구나.

스스로 쌓은 벽 안에 숨어 바깥을 경계하느라 피곤한 몸이 누울 수 있는 장소.

오늘 밤 잘 부탁한다. 내일은 좀 더 가벼워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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