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늦어도 11월에는>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제목이 가진 힘으로 11월만 되면 그 책이 생각난다. 앞에 붙은 '늦어도'라는 말이 11월에 어울린다. 달력 한 장 만을 뒤에 남겨둔 11월의 스산한 느낌을 잘 살려준다. 우연히 만난 작가 베르톨트에 첫눈에 반해 막대한 부와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집을 나간 유부녀의 내면 심리에 관한 이야기다. 시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남편도 받아주지만 마리안네의 심경은 혼란스럽다. 그녀가 사는 도시에서 베르톨트의 연극 <늦어도 11월에는>이 초연될 예정이다. 충격적인 엔딩 장면이 주는 쓸쓸한 여운이나 한동안 마음에 남는 비련의 주인공들이 외롭고 적적한 11월의 이미지를 상승시킨다.
11월은 요절한 천재 작가 전혜린이 생각나는 달이다.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를읽고 이상을 향한 열정과 자기 삶을 주도하는 에너지에 감동받았다. 나 또한 꿈 없이 평범하게 살지 않겠다고 일기장 한 구석에 새기며 다짐했었다. 11월은 전혜린이 번역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주인공 니나도 생각나게 한다. 감수성 풍부하고 독립심이 자라나기 시작할 무렵 받은 지적 정서적 자극은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고등학생 때 읽은 <생의 한가운데>에서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자기 삶을 이끌어가는 니나처럼 강한 의지를 갖고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꿈꾸는 자아상을 잊지 않으려고 이메일 아이디를 전부 nina로 만들었다. 영어학원 다닐 때 닉네임을 정하라는 말에 망설임 없이 Nina로 했었다.
11월 늦가을에 접어들면 남자 성악가의 노래가 간절하게 들린다. 그중에서 바리톤의 낮은 음색과 무게감 있는 음역대가 마음을 떨리게 하고 먹먹한 감동을 전해준다. <별을 캐는 밤>은 11월 깊은 밤에 잘 어울리는 노래다.
11월은 인디언 부족마다 여러 가지 다른 심상을 남기는 달이다. 체로키 족에게 11월은 '산책하기 좋은 달', 키오와 족에겐 '기러기가 날아가는 달', 아라파호 족에겐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다. 오늘 정진규의 시를 읽고 11월에 새로운 별칭이 생각났다. 11월은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까운 달'이다. 11월은 모든 것이 망각의 강에 빠져 검은 물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아직 따뜻한 볕이 남아있는 달이다. 해마다 달력이 한 두장 남을 때면 아이들에게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라고 이야기해준다. 코로나19로 힘들게 학교를 다니고 친구도 마음껏 못 사귀고 기댈 곳 없는 마음에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아쉬웠던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 남은 시간 동안 어린이의 광기를 드러내며 신나게 놀고 뜨거운 열정을 발산해보자. 서로에게 따뜻하게 스며들고 함께 멋진 것을 만들어가자. 사라져 가는 2021년을 맥없이 바라보고 있기엔 11월의 햇볕이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