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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B Sep 01. 2021

이제는 더 비싼 술도 마실 수 있어

과자 한 봉지에 맥주 한 캔


내 별명에는 '술'이 들어간다. 내 이름에 들어가는 '슬' 자에 점하나를 찍었더니 '술'이 되었다. 지금까지 10년 넘게 우정을 유지하고 있는 친구들이 대학생 때 지어주었다. 나는 심지어 여권에 쓰는 영문 이름에 'seul'이 아닌 'sul'을 쓴다. 그때 '슬'을 영문으로 쓰는 법을 잘 모르기도 했지만, 나도 무의식적으로 '술'자가 좋았나 보다. 아직도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술로 바뀐 이름으로 나를 부른다. 나도 그게 익숙하다. 별명에서 애칭이 된 셈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단 한 모금의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스무 살, 술맛에 제대로 눈을 떴다. 내가 생각해도 그 당시에 나는 술을 참 좋아했다. 학교 행사나 동아리 모임, 시험이 끝난 후의 각종 뒤풀이 자리에서도 열심히 마셨다. 밤늦게까지 과제를 하다가 마시기도 하고, 주류 반입이 금지되어 있던 기숙사 내에서도 몰래 마셨다. 학교 공원 벤치나 잔디에 앉아서 먹는 낮술도 즐겼다. 


평소의 나는 스스로를 정해진 틀 안에 두고 속내를 쉽게 내비치지 않는다. 내 이야기를 말로 하고 싶어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내가 나 자신과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딱딱한 틀이 말랑해지면서, 한결 솔직해질 수 있다. 단단한 내 마음이 풀어지는 감각이 좋아서 술을 마셨다. 나 자신과 멀어지고 싶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엄청나게 술을 잘 먹는 술고래, 술꾼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내 주량은 소주로 치면 최대 한 병정도 밖에 안 될 거다. 몸 상태에 따라 더 못 마실 때도 많았다.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좋아하기만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편하게 노는 술자리 자체도 좋았다. 술을 조금밖에 마시지 못해도 즐거웠다. 조금씩 자주 마셨다. 


대학생 때 단체 뒤풀이가 보통 그렇듯이, 술은 대부분 소맥이었다. 학교 앞 호프집에서 테이블당 맥주 3,000cc에 소주 한 병을 시켰다. 탄산이 강한 맥주에 소주를 타면, 한결 목 넘김이 부드러워졌다. 쉽게 술을 마셨고, 쉽게 취했다. 밤 12시가 되어가면, 통금 시간에 맞춰서 비틀거리면서 기숙사로 걸어갔다. 까만 하늘 아래, 줄지은 하얀 가로등 불빛은 내게 가까이 온 여러 개의 달 같았다. 길 아래로 어둑한 운동장이 은은하게 보였고, 내 발걸음 소리가 운동장까지 들릴 듯이 크게 느껴졌다. 몇 걸음 앞에서 걷고 있는 친구의 흔들리는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그처럼 흔들거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주말 내내 기숙사에 있을 때면, 내가 먼저 친구가 있는 옆방 문을 두드렸다.


"저녁 먹고, 맥주 한 캔?"


친구와 둘이 과 점퍼를 입고, 삼선 슬리퍼를 끌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기숙사 후문을 지나서 학교 뒷길을 걸었다. 좁은 동네 길이라서 인도가 없었는데, 차는 많이 다녔다. 둘이 나란히 걷다가도 차가 오면, 한 명이 뒤로 가 일자로 걸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화를 나누었다. 어쩌다 대화가 끊겨서 슬리퍼 끄는 소리만 나다가도, 금세 중구난방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편의점에 도착해서 350ml 맥주 두 캔과 과자 하나를 샀다. 편의점 비닐봉지를 달랑거리면서, 같은 길을 걸어서 돌아왔다. 친구와 기숙사 거실에 앉아서 TV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저녁이 지나고 밖이 어두워지면 맥주와 과자가 바닥을 보였다. 아쉽지만 또 나가기는 귀찮았다.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입맛을 다시며 TV에 집중했다. 


냉장고 안 편의점 맥주


요새 편의점에서는 500ml 수입 맥주 네 캔을 만 원에 판다. 조금만 큰 편의점에 가면 굉장히 다양한 맥주가 있다.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도 처음 보는 맥주가 많아서 고르기가 어려울 정도다. 예전에는 수입맥주 전문점에만 있던 맥주도 이제는 편의점에서 만날 수 있다. 


집에서 가볍게 술을 마실 때, 안주는 그때마다 구미가 당기는 걸로 배달시킨다. 원하는 게 뭐든 집 밖을 나서지 않고, 손가락으로 터치 몇 번이면 결제까지 끝난다. 주문한 음식은 아무리 늦어도 1시간 후면 집 앞에 도착한다. 일반 맥주나 소주를 먹을 거면 음식을 시킬 때 같이 시킬 수도 있다. 굳이 귀찮게 나가지 않아도 내 집이 호프집, 레스토랑이 된다. 


친구들이나 지인, 동호회 등의 여러 모임에서 수제 맥주, 막걸리, 와인, 샹그리아, 칵테일 등 다양한 술을 마신다. 안주는 치킨, 삼겹살, 스테이크, 파스타, 바비큐 등 셀 수 없다. 평생 한번 가볼 일이 있을까 싶을 만큼 생소한 나라의 음식은 물론 한식, 일식, 중식, 양식까지 다양하게 골라 먹는다.



당연히 맛있다. 얼마나 예쁘게 플레이팅을 해주는지, 사진을 찍을 맛이 나게 눈도 즐겁다. 돈이 좋다는 생각이 들 만큼 서비스가 좋은 곳도 많다. 편하게 전화나 인터넷으로 식당을 예약해서 쾌적하고 안락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밖에서 먹을 여건이 되지 않을 때는, 집으로 지인을 부르고 온갖 배달 음식을 시켜서 남부럽지 않게 홈 파티를 열 수도 있다. 


20대 초반, 한창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그때는 고작 하나에 2천원도 안하던 작은 캔맥주와 편의점 표 과자였다. 그것도 더 싼 걸로 먹으려고 한참을 들었다 놨다 하며 고민하다가 골랐다. 이제는 더 비싼 술도, 비싼 안주도 먹을 수 있다. 사실 이러려고 돈 버는 거라고 생각하면 못 사 먹을 것도 없다.


이렇게 돈을 쓰는 자유를 위해서, 내 일상의 자유를 지불한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조그만 내 자리에서 허리와 손목이 뻣뻣해지도록 컴퓨터 앞에서 버텨야 한다. 기분 나쁜 말을 들어도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서 웬만하면 좋게 넘어가야 한다. 그래야 매달 생활 할 수 있게 해주는 월급을 받을 수 있다. 야근이 없다면, 사람이 꽉 찬 전철에서 발을 밟히거나 어깨를 부딪치며 집으로 돌아온다. 별다른 의지 없이, 며칠을 반복하다 보면 어렵게 일주일이 끝난다. 매일 별거없이 하루가 지난다.


금요일 저녁, 터덜터덜 퇴근해서 어두운 집의 불을 밝힐 때면, 비싼 술이 아닌 그때의 캔맥주와 과자가 먹고 싶다. 오늘과 다를 바 없을 내일을 생각할 때면, 그때처럼 친구의 방문을 두드리고 싶다.


"오늘도 맥주 한 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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