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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Sep 18. 2024

이토록 완벽한 둘만의 결혼식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

“Ja.” 이 사람을 합법적인 남편으로 받아들이겠냐는 주례자의 물음에 나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 짧은 순간을 위해 그토록 많은 수고를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행복했다. 나를 바라보는 켄의 눈이 촉촉했고, 그 눈빛에 내 눈가도 뜨거워졌다. 행복한 날인 만큼 울고 싶지 않아 방긋 웃어 보였고, 우리의 해맑은 웃음에 주례자까지 함께 웃었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결혼 날짜였다. 길고 긴 4년 9개월간의 시간 동안 많은 서류 문제 때문에 거의 결혼을 포기했었다. 그러다가 정식 혼인을 할 수 있는 날이 딱 6개월만 주어졌고, 첫 일주일간은 어떻게 날짜를 정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여러 번의 대화 끝에, 손님들을 많이 부르는 결혼식은 시간이 촉박하니 차라리 시험관 시술을 한 번이라도 더 시도할 수 있도록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자고 결정했다. 또 켄의 가족을 포함해 가까운 친구 몇몇을 부를까도 했지만, 우리 가족도 없이 올리는 결혼식이라 나는 분명 섭섭함에 감정이 요동칠 텐데 이런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기 싫었다. 그래서 결국 단 둘이서만 하기로 했다. 


둘만의 소박한 결혼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 이렇게 정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는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사실 바닷가에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불러놓고 아주 즐겁고 시끌벅적하게, 그렇게 활기찬 결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축축한 독일에서 아무도 없이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니! 모든 것에 짜증이 났다. 


나는 그저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서류에 사인하는 것으로 단순하게 절차들을 끝내려고 했다. 마치 별 것 아닌 행정처리인 것처럼 나를 속이고 싶었다. 이런 보잘것없는 작은 결혼식이 내 진짜 결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미래를 떠올리면 언젠가 이 초라한 결혼식에 서운하고 속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아무렇게나 결혼을 해버리려고 했다.


그렇게 나의 행복할 기회를 날려버리고 소중한 날을 망가뜨려 버리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나는 어차피 불행한 사람이니까’라며 행복할 기회를 모조리 파괴할 생각이었다. 아무도 없는 결혼식인데 청바지를 입든 맨얼굴에 사인만 하든 알 게 뭐람! 끝없이 펼쳐지는 나를 향한 나의 반항심과 인생을 바닥까지 파괴해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거칠게 마음속에서 다퉜다.


불과 결혼식 열흘 전이었다.




상담 선생님은 내게 그렇게 하지 말라며, 꼭 내 마음에 드는 웨딩드레스를 골라보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그리고 아무도 참석하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결혼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다. 나는 침울한 얼굴과 불안한 눈빛으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봤자 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을 거고, 나는 기필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신부가 되겠다, 이 얼마나 안쓰러운 마음이었던가.


이 상담이 9월 3일이었다. 당장 다음 주 수요일인 9월 11일이 결혼식이었다. 지난 5년 동안 수도 없이 웨딩드레스를 검색하고 상처를 받았었기에 다시 웨딩드레스를 알아보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지쳤다.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았고 상담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게 내리쬐는 햇빛이 따갑게만 느껴졌다. 왜 이렇게 세상은 쓸데없이 밝기만 한 것인지, 어떤 길 잃은 행성이 지구를 날려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혼 따위 하든 말든 뭐 어쩌라고. 죽을 거면 나만 죽이지 말고 그냥 다 죽여달라고, 세상을 마구 박살 내달라고 거칠게 빌었다. 그러다 갑자기 켄은 살아야지, 엄마는 살려야지, 여동생은 살려야지 하며 살려야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각났다.


나는 웨딩드레스라는 나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애써 떠올리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핸드폰으로 이런저런 쇼핑 사이트에 들어갔다. 도저히 쇼핑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곧 마음이 복잡해져서 조금 더 쉬운 숙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결혼 소식을 알린 것이다. 나는 그간 열심히 상담을 받으며 배운 대로, ‘약한 모습을 보여줘도 된다’고 되뇌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내 감정을 이야기했다.


"드디어 결혼식 날짜가 정해졌어. 다음 주 수요일이야. 그런데 사정이 있어서 아무도 없이 둘만 하게 됐어. 사실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어쨌든 결혼식은 결혼식이야." 나의 시무룩한 목소리에도 가족과 친구들은 정말로 기뻐했다. "그래, 네 마음이 얼마나 서운하겠어. 그래도 오랫동안 기다렸잖아. 정말 축하해! 네가 가장 행복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어."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약간 내 인생에 삐져 있었던 것 같다. 맘대로 되는 게 어쩜 이렇게 하나도 없는 건지 속상했다. 그러나 주변의 축하를 받을 때마다 그 삐져버린 어린 마음이 조금씩 달래졌다. 


'그래, 다들 이렇게 축하해 주는 결혼이라면 나도 사실은 조금 기뻐해도 되는 것 아닐까?'




그날 밤에 온라인에서 웨딩드레스를 하나 겨우 발견했다. 내 마음도 모르고 디룩디룩 쪄버린 살들을 요렇게 저렇게 잘 가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이런. 그럼 그렇지.’ 웨딩드레스를 판매하는 곳은 아쉽게도 프랑스 사이트였고 내 사이즈가 없었다. 독일까지 도착하려면 그래도 일주일은 걸릴 텐데 이게 오려나 싶어 또다시 속이 상한 채 잠이 들었다.


9월 4일 아침, 늦잠을 자서 부랴부랴 업무를 시작했다. 그때 이메일이 하나 왔다. 어제 봤던 사이트에서 보낸 10% 할인 쿠폰이었다. 나는 괜히 아쉬운 마음에 웹사이트에 들어가 어제 골라놓았던 웨딩드레스를 다시 쳐다봤다. '어?' 어젯밤에는 보이지 않았던 다른 사이즈가 보였다. 키가 작은 여성들을 위한 쁘띠 사이즈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재고가 있었다. 그리고 재고가 있는 사이즈는 배송이 2일 안에 시작되고, 유럽 내 배송은 2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문구가 떠 있었다. ‘너무 아슬아슬한데? 하지만 다른 드레스는 마음에 드는 게 없는걸. 어쩌다가 마음에 드는 건 말도 안 되게 비싸단 말이야. 그런데 이건 할인까지 받을 수 있잖아?’ 


그렇게 갑자기 이 예쁜 드레스를 갖고 싶은 욕심에 켄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이왕 살 거면 조금이라도 일찍 사야 결혼식 전까지는 배송이 될 테니까 말이다. 웨딩드레스를 샀더니 이젠 켄의 옷이 마음에 걸렸다. 나와 함께 살이 찐 켄의 몸에 맞는 정장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주말에 켄의 양복바지를 사러 가기로 했다. 불운이 그간 충분했던 것인지, 행운도 균형을 맞춰 찾아와 줬다. 정말 좋은 가격에 켄에게 딱 어울리는 양복바지와 와이셔츠를 살 수 있었다. 또 충동적으로 들른 액세서리 가게에서 예쁜 웨딩용 머리핀도 발견했다. 내 웨딩드레스랑 딱 어울릴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틀어 올려보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도 해보고 화장도 해봤다.


이렇게 주말을 보내고 나니 슬슬 설레기 시작했다. 기분도 좋아지고 내 마음도 날이 개나 보다 싶었다. 갑작스럽게 밝아진 내 표정에 켄은 안도하면서도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나는 그냥 이왕 결혼하는 거면 행복하게 하고 싶어 졌다고 말했다. 또 나도 변덕스러운 내 마음을 다 헤아리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사실은 예쁜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던 것뿐인데, 맘대로 되지 않아 토라졌었고 이 복잡한 마음이 불안과 우울, 공황에 뒤범벅으로 가려져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놓기가 싫었다. 이제 남편이 될 사람한테마저 원래 결혼식엔 전혀 흥미가 없던 사람인체 하고 싶었고, 유치한 내 마음을 들키기도 싫었던 것 같다. 물론 들키기 싫다고 켄이 몰랐을 리는 없었을 텐데 말이다.


켄은 큰 내색 없이 그저 나의 변덕에 열심히 발을 맞춰주며 모든 것이 다 예쁘고, 다 마음에 든다며 내 기분과 행복에 신경을 썼다.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결혼식 이틀 전인 월요일엔 웨딩 부케를 꽃집에 주문했다. 켄은 한인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듬었다. 나는 웨딩드레스가 제 날짜 전까지만 와주길 간절히 바라며 고객센터에도 글을 남겼다. 이미 지난주에 출발했다는 메일을 받았지만, 드레스가 도통 언제 도착할지 몰라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화요일 점심까지도 옷이 도착하지 않으면 급하게라도 가까운 백화점에 들러 하얀 드레스를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화요일, 결혼식 하루 전이었다. ‘띵동!’ 커다란 소포가 배달 왔다. 켄의 회사에서 보낸 결혼 선물이었다. 작은 샴페인과 큰 꽃다발, 축하 카드였다. 켄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꽃 선물을 받자 우리가 정말 결혼을 한다는 것이 실감 났다. 켄은 부랴부랴 회사에 휴가를 냈다. 모든 것이 정신없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행복한지 불행한지 우울한지 기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그 모든 것이 차례차례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결혼 하루 전 도착한 꽃 선물과 드레스


그리고 꽃이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행스럽게 나의 드레스도 도착했다. 얼른 방으로 들고 들어가 입어보았다. 세상에나, 정말 예쁜 드레스였다. 다만 어깨와 가슴 부분이 많이 널널해서 입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핀으로 고정해야 하나 고민하다 집 앞의 세탁소로 켄과 함께 달려갔다. 내일 결혼식인데 그때까지 수선이 가능한지 조마조마하게 물었다. 혹시나 불가능하면 어쩌지 싶었다. 그러나 맘씨 좋은 아주머니는 두 시간이면 된다며 나를 안심시켜 주시곤 꼼꼼하게 핏을 맞춰주셨다.


두 시간 뒤에 켄은 나에게 딱 맞게 다시 재단된 드레스와 주문했던 부케를 받아왔다. 나는 신이 나서 웨딩드레스와 부케를 들고 힐까지 함께 신어보았다. 켄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너무 예쁘다.”


우리는 모든 준비물이 다 모였기도 했고 결혼식인 수요일에 비 예보가 있어서, 미리 둘만의 웨딩 촬영을 하기로 했다. 연습한 대로 머리를 하고 화장을 했다. 켄도 양복을 입었다. 집 앞 공원으로 나가 삼각대를 세워놓고 둘이서 깔깔거리며 촬영을 했다. 웨딩드레스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지나다니는 사람마다 우리를 바라보고 행복하게 웃어주었고,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짧은 스몰 토크도 오갔다. 여러 명이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다. 삼각대가 찍어주는 우리 둘만의 사진도 충분히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사진을 남기고 있자 갑자기 너무 설레고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 기분을 잊고 싶지 않아 켄과 함께 짧은 인터뷰를 담은 영상도 남겼다. 우리가 찍는 셀프 웨딩 비디오였다.


집 앞 공원에서 결혼식 하루 전 날




드디어 수요일, 결혼식 날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주 끝내주게 맛있는 아침을 차려 먹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란프라이에 크루아상, 커피였다. 늘 먹는 메뉴가 이렇게나 특별하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일까? 아침을 먹고 나자 예상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 결혼하면 잘 산대!” 설거지를 하는 켄에게 한국의 미신에 대해 신나게 설명해줬다. 우리는 이 미신이 생긴 원인을 이렇게 저렇게 추측하며 다시 깔깔거렸다. 평소처럼 수다를 떨다 내 결혼식에 늦을 판이었다.


결혼식은 11시여서 서둘러 샤워를 하고 화장을 했다. 거울을 보는데 너무 웃겼다. 턱 밑과 코 옆에 뾰족하게 뾰루지가 아주 땡땡하게 올라와 있었다.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는 결혼식이라 신경이 쓰이지 않았고, 켄은 언제나처럼 나의 모든 모습을 예쁘게 봐줄 테니 무엇이 문제겠는가.


아이라인을 그리는 손이 달달 떨렸다. ‘아니, 이게 뭐라고! 이렇게 손이 떨려?’ 어제는 제법 쉽게 올린 머리 장식 핀도 왠지 잘 꽂히지 않아 켄을 불렀다. 켄에게 핀을 좀 꽂아달라고 했는데 켄도 긴장해서 잘 되지 않았다. 너무 긴장된다며 서로를 바라보고 소리를 지르며 이번에도 한참 웃었다. 결혼식까지 겨우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겨우 진정하고 마지막 핀을 꽂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도 이미 입어본 웨딩드레스였지만, 아침에 깔끔하게 면도한 켄의 옆에 서자 정말로, 세상에 하나뿐인 신부가 된 것 같았다.


우리는 서둘러 차에 탔다. 결혼식장은 집에서 2분도 걸리지 않는 동네 구청의 작은 건물로, 결혼식을 위해 적당히 꾸며진 곳이다. 텅 빈 이 소박한 공간에 지난 4년여간 우리 서류를 함께 준비하고 도와준 공무원이자 우리의 주례자인 미세스 카우츠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아준 카우츠 씨는 정성스레 쓴 주례사를 읽었다. 우리 지난 연애사까지 대부분 알고 있기에 쓸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가득 담긴 따뜻한 주례사였다.


주례사를 듣는 동안 지난 8년간 우리가 함께한 행복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잠시 눈물이 날 것 같아 심호흡을 여러 번 하자, 켄이 내 손을 단단하게 잡아주었다. 이렇게나 완벽한 남자가 내 남편이 된다니,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켄의 이름과 내 이름을 번갈아 부른 카우츠 씨가 우리에게 법적인 아내와 남편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겠냐고 물었다. 켄도 나도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우리는 드디어 부부가 되었다.


그토록 받고 싶었던 '혼인증명서'를 들고




사실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내년에 손님들을 불러 정식으로 결혼식을 크게 한 번 더 올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충분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었다.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우리 둘만을 위한 날이었다.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고 그저 켄은 나를 바라보고, 나는 켄을 바라본 소박하고 예쁘며 반짝이는 날이었다.


이토록 완벽한 결혼식이라니. 나는, 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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