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터리 같은 책임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결혼식이 끝난 뒤, 켄의 남동생을 만나기 위해 베를린으로 떠났다. 신혼여행 겸 계획된 것은 아니었고, 결혼 날짜가 정해지기 전부터 베를린을 갈 계획을 하고 있었다. 지난 몇 달간 우울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한 남동생이 30번째 생일파티를 드디어 열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번만큼은 꼭 그의 곁에서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러는 사이, 갑작스레 우리의 결혼 서류가 통과되었고 결혼 날짜가 정해졌다. 결혼식은 9월 11일이었고, 생일파티는 베를린에서 9월 14일, 그리고 9월 15일엔 담슈타트에서 켄의 삼촌의 70번째 생일파티가 있었다.
독일에서는 ‘0’으로 끝나는 생일은 더욱 특별하게 여긴다. 그래서 이 모든 스케줄을 소화하고자 우리는 꽤 무리한 일정을 소화했다. 결혼식이 끝난 수요일엔 하루를 쉬고, 목요일에는 두 사람의 생일 선물을 준비한 후, 금요일에 6시간 동안 운전해 베를린으로 향했다. 남동생과의 젊은 에너지 넘치는 클럽 생일 파티를 마친 뒤, 월요일엔 다시 6시간을 운전해 담슈타트로 돌아와 또 다른 생일파티에 참석했다. 정말 정신없이 소화한 대단한 일정이었다. 둘 다 엄청난 피로감에 쓰러지다시피 했고, 결국 코로나에 걸려 지금까지 거의 일주일째 고생 중이다.
그래도 아끼는 이들의 소중한 순간에 함께했다는 안도감에, 힘들었지만 우리는 둘 다 만족스러웠다.
켄의 남동생은 켄과 12살 차이가 나며, 현재 30살인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대학생, 직장인이다. 베를리너답게 힙스터적인 감각과 쿨한 성향이 있지만, 동시에 경제적으로는 힘들고 심리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남동생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따로 꽃가루를 사 와 우리에게 뿌려줬고 결혼 선물로는 예쁜 꽃을 받았다. 우리 역시 가족들과 함께 모은 돈으로 준비한 플레이스테이션 5를 생일 선물로 건넸다. 남동생은 매우 기뻐했고, 켄이 몇 시간이나 정성스럽게 쓴 편지와 나의 편지도 함께 선물로 전달했다.
나는 편지에 나의 30살 때를 떠올리며, 그때는 모든 것이 실패로 뒤범벅이었지만 독일에서 조용히 맞을 수 있었던 것이 내심 다행이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지난 9년 동안 겪은 모든 일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지만, 인생은 어떤 방향이든 놀라운 일들로 자연스럽게 흐르기 마련이니 너무 애쓰지 말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 나이에 맞게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남동생에게 조금은 편안하게 마음의 여유를 두라는 말을 조용히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정말 즐거웠지만, 켄은 남동생에 대한 걱정을 끊임없이 했다. 나는 켄에게 너무 많은 걱정은 오히려 동생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며, 그저 믿어주고 지켜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했다. 켄은 내 말에 수긍했고, 덕분에 조금 더 편안하게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사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엄마는 우리에게서 책임감을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이 셋을 혼자 키우며 모든 것을 해낸 엄마를 보며 자랐다. 반면, 아빠는 내게 항상 높은 기대만 걸어놓고, 실제로는 몹시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똑똑한 첫째 딸’이라는 기대에 부응해야만 아빠와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 것 같은 불안감 속에서, 나는 늘 애를 썼다. 아빠의 기대를 저버리면 우리의 관계가 단절될 것 같은 두려움도 있었다. 동시에 아빠처럼 무책임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강한 열망이 있었고, 엄마에게서 배운 삶의 방식 덕분에 나는 점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강박적인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이 책임감은 때로 친절로 나타났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따돌림을 당하거나 소외된 친구들을 보면 꼭 그들과 시간을 함께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런 친절은 종종 지나친 오지랖으로 변질되었다. 내가 아니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타인을 과소평가하는 오만함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그룹에서 책임감 있는 리더로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사람으로도 여겨지곤 했다.
가끔 드라마에서 첫째 딸들의 성격이 더럽게 묘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내 안에는 불안감으로 범벅된 책임감, 완벽주의, 그리고 우월감이 모두 뒤섞여 있다.
특히 이런 성향은, 시작한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실패가 뻔히 보일 때조차 끝까지 매달리게 만든다. 한 번 결정한 일을 번복하는 것이 두려웠다.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끝까지 해낼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시작조차 하지 않는 모순적인 성향도 여기서 비롯된 듯하다. 때로는 과하게 몰입해 모든 것을 쏟아붓기도 하지만, 그 결과가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실 대부분 그렇다) 나는 또다시 바닥으로 떨어져 괴로워한다. 마치 실패를 위해 모든 것을 시작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결과가 불분명한 일들만 골라 도전하면서도, 결과가 명확한 도전은 피해버리곤 한다.
얼마 전 ‘티쳐스’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내신 성적은 좋지만 모의고사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에게 <무서워서 우리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 사자>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 떠오른다. 나도 마치 그런 느낌이다.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은 있지만, 실제로는 도전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과장해 ‘사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 기대만큼의 노력을 스스로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 안에 있다’는 핑계로 안전한 공간에 머무르려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일이 틀어지거나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올까 두려워하는 내가 있다. 결국 모든 것이 내 통제 아래 있어야만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자꾸 잘하는 것만 반복하면서도, 마치 그것이 새로운 도전인 양 착각한다. 동시에, 그 도전이 실패로 끝날까 봐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이런 나의 잘못된 신념들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뻗어나가서 내 자유를 스스로 제약한다.
첫째로, 나는 남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나약한 모습이 들키는 것이 두려워 억지로 언성을 높이거나 아무렇지 않은 체한다. 이런 위악적인 행동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그냥 솔직하게 무섭다고, 힘들다고 말하면 될 것을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혼자서만 벌벌 떤다.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나약한 모습을 보여줘도 괜찮다’고 되뇌지만 쉽지 않다. 나는 언제나처럼 억지로 웃거나 괜찮다고 말하며 상대방을 안심시키려고, 혹은 나의 나약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또는 상처를 받아놓고 슬픈데, 슬픔을 숨기기 위해서 화가 난 체한다.
둘째로, 자꾸만 다른 사람을 책임지려고 한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실제로 그렇게 많지 않다. 다들 자기들 밥벌이를 잘하면서 잘 살고 있다. 그러나 홀로 결정한 이 무거운 책임감은 자꾸만 돈을 건네주거나, 혹은 꼭 돈을 줘야만 할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게 한다. 누군가 내게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토로하면 그저 옆에 있어 달라는 의미일 뿐인데도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밤새 고민하곤 한다. 나의 도움이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지는 깨닫지도 못하고 자꾸만 도와주려 한다. 사실, 나는 그들을 책임질 필요가 없다. 그들의 인생은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다. 역시나 상담 이후 ’다른 사람을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되뇐다. 그러나 여전히 자꾸만 도와주지 못하는 나의 능력 없음을 슬퍼하곤 한다. 아, 내가 돈이 좀 더 있었다면 그들을 도울 수 있었을 텐데!
셋째로, 다른 사람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고 그 사람의 문제나 업무까지 나의 것으로 만들곤 한다. 나는 내가 부탁을 정말 단칼에 잘 거절하는 똑 부러진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왔다. 그러나 내가 아끼는 사람들의 부탁은 무리를 하면서까지 절대 거절을 못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거절한 부탁은, 아끼는 사람들에 대한 더 큰 책임감 때문에 거절한 것들뿐이었다. 누군가 업무 부탁을 해오면, 우리 팀에 해로운 부탁은 거절한다. 그러나 팀원이 부탁하는 건 내 스케줄에 무리가 가더라도 거절하지 못한다. 대충 이런 식이다. 또 결국엔 그 사람의 개인적인 사정도 내 일처럼 여기곤 한다.
특히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위의 세 가지 모습은 더 아프게 다가갈 수밖에 없다. 큰일이 생겨도 나 혼자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 오해를 사고, 그들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만들며, 결국에는 무리하다가 스스로 망가지곤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엉터리 같은 책임감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켄과 8년을 함께 했지만, 이번에 정식으로 혼인하면서 법적인 가족들이 한꺼번에 생겼다. 이로 인해 내가 책임져야 할 범위가 넓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그 생각을 뒤집기로 결심했다. 이제는 내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싶다. 내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내 연약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애써 강해지려 노력하지 않고, 좀 더 편안하게 지내고 싶다.
베를린에서 켄의 남동생과 대화를 나누며 몇 번이나 울었던 것도, 그 과정에서 우리가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로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굳이 강한 척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오히려 우리 모두가 편안해진 상태에서 더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켄과 함께 남동생을 믿고, 그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우리를 손님으로 맞이한 남동생의 정성을 고스란히 받으며, 그의 경제 사정이 걱정되더라도 돈을 억지로 내밀지 않으려고 했다. 과도한 책임감에 시달리지 않으려 애썼고, 우리가 해야 할 도움의 범위를 명확히 하며 그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덕분에 남동생도 자신이 손님을 접대할 수 있다는 기쁨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평생 품어온 오만한 착각들이 하루아침에 고쳐질 리 없으니까. 켄의 부모님을 혼인 후 처음 만난 것은 켄의 삼촌의 생일파티 날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들이 기대하지도 않는 ‘착하고 순종적인 며느리’처럼 행동하려고 애쓰는 나 자신을 깨달았다. 독일에서 9년이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모님에게서 배운 신념은 참으로 질기고 질겼다. 다만, 상담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내가 이런 억지로 만들어낸 모습을 빠르게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발견했다고 해서 금세 고쳐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존경과 믿음을 기둥 삼아 천천히 변화하려고 한다. 사실상 변한 것은 서류 한 장뿐이지만, 결혼 생활이 행복과 낭만으로 시작된 만큼, 이를 계기로 조금 더 용기 있게 나아가고 싶다.
이제 왕관은 조용히 내려놓고 야생으로 사냥을 나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