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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land Mar 12. 2023

다정을 건네는 연습

어디선가 살아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캐릭터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어디에선가 잘 살아가고 있기를 응원하게 되는 그런 캐릭터가 말이다. 나에게는 그중 한 명이 <나의 해방일지>의 미정이다.


미정이는 모든 관계가 노동이라고 말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라고 말이다. 미정이에게는 왜 일상이 노동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불편한 구석 없이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느껴져서 일 것이다. 좋아하는 줄 알았던 사람들과도 대화 속에 미세하게 느껴지는 균열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타인에게 마음 열기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법이니까.


그런 미정이가 나를 추앙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서 조금씩 달라진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나의 태도를 바꾸는 게 아니라 그냥 쭉 좋아해 보기로 결심한 미정이 처음으로 그런 상대가 되어준 구 씨와 카톡을 하던 날 사무실에서의 대화 장면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미정이의 감정에 이입해서 드라마를 봐서 그런지 유독 사무실의 동료들이 야속해 보였다. 미정이를 겉모습으로만 판단하고, 미정이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는 미정이의 동료들 사이에서 미정이의 모습이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구 씨와 처음 카톡을 주고받고 ‘통장에 돈 꽂힌 것처럼 기분이 좋다’는 미정이는 옆자리 동료에게 말을 건넨다. 항상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였던 미정이가 처음으로 타인에게 관심을 보인 순간. 향기가 좋다며 말을 건네는 미정이의 모습이 성장한 것만 같아 덩달아 뿌듯하기도 잠시, 그런 미정이의 태도에 반응하는 옆자리 동료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 핸드크림. 이거 좋지? 하나 사줄까? 한번 발라봐.” 훅 들어온 미정이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하며 반색한다. 처음으로 미정이가 회사 동료와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것으로 보인 순간이다. 항상 동료들에게 선을 긋던 미정이가 처음으로 선을 지우는 순간,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기뻐하는 옆자리 동료의 반응을 보고, 그들 또한 계속해서 벽을 만드는 미정이로 인해 외로움을 느꼈을 수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장면이 내게 유독 남았던 이유는 아마도 첫 직장에서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곳은 내 자리가 아니고, 나는 이곳에 잠시 머물다 갈 곳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저 사람들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벽이 그 누구도 아닌 내게 있었다. 완전히 속하지 않아 외로우면서도, 기꺼이 섞이고 싶지 않아 했던 때가. 그때의 그런 나에게 곁을 내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선의로 인해 나는 조금씩 마음을 열고 적응할 수 있었다.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보여준 환대가 가끔 생각난다. 그 선의가 고마우면서도, 모난 돌처럼 행동하던 내 모습까지 말이다.


위선도 악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가식적으로 행동할 거라면 차라리 솔직한 위악이 낫다고 생각할 때가. 그런데 지금은 좀 생각이 다르다. 언제나 말과 행동에 순도 100%의 진심이 담겨 있다면 좋겠지만, 항상 그럴 수만은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1%의 진심이라도 키우고 키워 내뱉는다면 그 소소한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100%로 가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미정이의 한걸음을 기다리고 있던 동료처럼 말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쩌면 다정을 건네는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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