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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land Mar 20. 2023

끝나고 시작되는 이야기

영화 <애프터 썬>을 보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며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자료조사나 이야기의 플롯을 만드는 부분보다는 이 이야기를 읽을 독자를 설정하는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 과연 누가 내가 쓴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여기고 공감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버스나 지하철에서 만난 누군가의 얼굴을 유심히 보며 저 사람이 살아온 인생과 내가 품고 있는 이야기의 사이의 교집합을 고민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도 서로 각기 다른 입장을 지니고 있는 개별적인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다보면, 타인의 이야기를 오롯이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교만이지 않을까 하는 회의적인 결론에 까지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극 속 이야기가 끝나고 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면, 그렇다면, 극 속 인물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나의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영화 <애프터 썬>을 보면서 들었다. 101분의 영상을 보고 나온 순간부터 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선명한 햇살과 함께 눈부셨던 두 부녀의 여름 휴가는 끝이 났는데 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빠와 딸은 여름 휴가로 튀르기에로 여행을 떠난다. 이혼 이후 엄마와 살고 있는 열한살의 딸과 서른한 살의 아빠의 여행은 매우 오랜만이다. 청량한 파란 이미지가 돋보이는 하늘과 수영장 그리고 바다, 저녁이면 인생사의 모든 고통을 초월한 채 흥겨움만 남는 것 같은 오래된 리조트에서 보내는 시간은 금방이라도 끝이날 것 같은 불안감과 함께 이어진다.


그들의 여행은 아빠와 딸이 번갈아가며 찍는 홈비디오에 남겨지는데, 마치 나의 유년시절인 듯 아련하다. 낮은 화질에 기록된 그때의 기억은 선명한 것만 같은데 이제 서른살이 된 딸의 세상에 아빠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것 만으로도 함께인 것 같았던 아빠였는데, 이제 더 이상 함께일 수 없는 세상에 딸만이 남아있다. 그렇기에 이들이 함께 한 여행을 담은 홈비디오는 아주 작은 단서가 된다. 희미해져가는 그 시절에 대한 기억과 그 시절의 아빠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단서를 통해 짐작되는 아빠의 마음의 변화를 나 또한 딸과 함께 찾게 된다. 명상하는 법에 대한 책이 쌓여있는 장면과 마음을 다스리는 수련을 반복하는 아빠의 뒷모습을 통해 짐작하고 짐작하면서.


영화의 한 장면을 꼽는다면, 아빠와 딸이 함께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은 장면을 고르겠다. 시간이 지나고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 가지만, 그와 반대로 사진은 보다 선명해진다. 그 선명해진 둘의 모습에는 분명 사랑이 눈에 보이고, 불안도 눈에 보인다. 그들의 사랑과 불안이 어디서 기인한건지 대사와 표정을 단서로 쫓아가다보면, 홈비디오같은, 폴라로이드 사진같은, 영화를 한번 더 봐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아니, 나의 기억은 어렴풋해지지만 보다시피 영상은 보다 선명하게 진심을 담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혹시 지금이라면,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이라면 알아봐줄  있을  같은 단서를 나의 이야기 속에서 떠올리게 된다. 내가 나눴던 가족과의 대화, 나도 모르게 선명하게 상처를 남겼던 순간에 대해서, 그리고 나로 인해 기인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은 이해할  있을 것만 같은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게 된다. 그런데, 나의 기억엔 폴라로이드 사진도 홈비디오도 없고, 그래서 더욱 막연하고 어려울 뿐이다. 지나쳐버린 순간들을 곱씹으면서 그렇게, 극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된다.


영화 포스터를 받아왔다. 분명 영화를 보기 전에는 아빠가 딸을 안아주는 모습이었는데, 보고 나오니 딸이 아빠를 안아주는 모습으로 보인다. 시간을 되돌릴 순 없더라도, 마음에도 애프터 썬을 발라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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