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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land Jun 11. 2023

지리산 종주 실패담

2박 3일 성중종주 실패 후기

오랜 여행 메이트가 있다. 주로 ‘하드코어 한’ 여행을 함께 다녔다. 예를 들어, 캄보디아에서 현지인 집에 머문다거나, 인도와 라다크에서 배낭여행을 한다거나, 당일치기로 한라산 백록담 등반을 시도한다거나 하는. 과연 이 여행의 마침표가 찍힐까 의문이 드는 여행방식을 둘 다 불평 없이 받아들여왔기 때문이다.


그중 기억에 남는 여행은 라다크이다. 비행기로 가거나, 며칠을 봉고차 타고 이동하는 방식의 육로 이동 중 선택해야 했는데 둘 다 큰 이견없이 육로 이동을 선택했다. 너무 힘들 거 같다고? 에이 우선 가보자고! ‘한번 가보자고‘의 정신은 우리의 여정을 잘 보여준다. 버스가 고장 나 고쳐지기를 기다리다 우연히 마주친 풍광에 감탄하거나, 무릎을 맞대고 조금이라도 자리를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던 옆자리 사람과 이내 함께 짜이 한잔 마시고 인사하며 헤어지는 방식의 여행은 우리에겐 일상적이었다.


그런 우리의 오랜 여행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바로 <지리산 종주> 었다. 1) 우리의 한계를 시험할 수 있고, 2) 난생처음 해본 일이며 3) 지리산의 멋진 능선을 앞마당처럼 거닐 수 있다는 점이 구미가 당겼다. 더 늦기 전에 가야지! 대체 뭐가 늦었다는 건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한 명의 발을 동동 구르며 추진하기 시작하면, 어느새 여행의 수레바퀴는 돌아가기 시작한다. 멈추는 법은 모른다는 듯이, 빠르게. 못 이기는 척 승낙의 의사를 표하면 그때부터는 못 가겠다는 뉘앙스만 풍겨도, 어어 동작 그만, 밑장 빼기냐!! 번복은 불가다.


그렇게 말 꺼낸 지 이주도 되지 않은 시점인 바로 오늘, 정말 지리산에 왔다. 무려 2박 3일의 성중종주 코스였다. 밤 열한 시, 동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와 성심재에서부터 노고단, 연하천, 벽소령 대피소를 지나 천왕봉 일출까지 보고 하산하는 긴 코스였다. 그리고 지금 이 밤은 우리의 일정대로라면 벽소령 대피소에서 일정을 마무리하고 별을 구경하고 있어야 했지만, 지금 우리는 벽소령까지는 가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연하천 대피소에 누워있을 뿐이다. 심지어 내일 당장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하산 길을 알아보면서. 변명의 여지없이 이번 <지리산 종주>는 실패다.


이번 실패의 시그널은 대체 어디 있었을까. 사실 우리가 방치한 시그널은 수없이도 많았다. 정보를 얻기 위해 서칭 하던 인터넷 후기에서 분명 봤던! 지리산 종주 실패 선배들이 요목조목 남겨준 실패 원인은 산에 오르고 나서야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누가 겨우 하나를 꼽아 말해줄 수 있을까. 출발하기 전날에도 정형외과에서 허벅지에 통증으로 염증 치료를 받았음에도 스스로의 체력을 과신했던 점? 3일 내내 8킬로 무게의 배낭을 이고 지고 산을 올라야 하면서도, 당일 출발 전에서야 겨우 배낭을 메어 보고 생각보다 묵직한 느낌에 아리송해했던 점? 초반에 페이스 조절을 하지 못하고 가지 않아도 될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객기를 부렸던 점? 변명의 여지없는 오만이었다.


대피소에 겨우 도착하기 위한 마지막 한걸음 한걸음은 고통 그 자체였다. 쓰레기도 그대로 다 들고 가야 하는 산 안에서, 우리는 배낭의 무게를 줄일 수도 없이 그대로 지고 순응하며 오를 수밖에 없었다. 광활하고 거대한 자연 앞에서 우리의 ‘가보자고’ 정신은 한없이 무력할 뿐이라는 것을 절절히 느끼면서 말이다. 무게와 통증에 짓눌린 와중에 엿본 지리산 풍경은 야속하게도 아름다웠다. 산의 능선을 타고 흐르는 구름에서부터, 완전한 형태를 자랑하는 연둣빛 잎사귀들까지. 이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는 이는 마치 우리뿐 인 것만 같았다.


다음번에는 이 멋진 산을 대하기에 걸맞은 태도를 갖추고 다시 와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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