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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land Jul 03. 2023

샤머니즘이 필요해

사주를 자주 봤던 시기가 있다. 남은 인생은 구만리 같은데, 대체 내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 예측이 되지 않던 시기였다. 대학교까지는 어찌어찌 오고 이제 곧 졸업까지 하는데, 당장 다음 스텝이 너무도 모호해 보였다. 모호한 만큼 선택지는 넓고 다양했고, 어떤 결과를 내리든 그 결과를 책임져 줄 이는 나밖에 없기에 두려움은 커져갔다. 그나마 위안이 되어주던 이는 스터디를 함께 하던 동료들이었다. 원형탁자에 둘러앉아 두려움을 나누고,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편의점에서 채워가며 끊임없이 입을 놀리던 그 시기, 누군가 말했다.


“야, 우리 사주 보러 갈래?”

사주? 나의 사주에 대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은 건 고삼 때였다. 그 당시의 나는 마냥 즐겁고 자신감에 차 있었는데, 엄마는 나의 미래가 무척이나 염려스러웠던 듯했다. 나는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엄마는 용하다는 사주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종이 한 바닥 깨알 같은 글씨로 무언가를 적어오셨고, 집에 돌아와 나에게 직접 알려주지는 않은 채 아빠에게만 보고 온 내용을 공유해 주셨다. 모두가 이미 잠에 든 밤, 거실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엄마아빠의 목소리에서 나의 이름을 주파수처럼 읽어냈고 특정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대학명을 귀 기울여 들었다. 사주에 S대나 Y대가 없어 부모님은 실망하셨던 듯하고, 나의 사주에 있다는 C와 H 등으로 시작하는 대학을 다음날 나는 조용히 검색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C대학에 진학했으니 사주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아예 바닥은 아니었다.


그렇게 넷이서 사주를 보러 갔다. 대학가에서 오며 가며 봤던 사주 간판을 누군가가 기억해 냈다. 딱히 그 철학관의 명성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채. 먼지 쌓인 책들로 가득했던 좁고 어두운 그곳에서 우리는 잔뜩 기대에 차 줄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해당 철학관을 검색해 보니 우리와 토씨하나 안 틀리고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후기가 수두룩했다… 는 안타까운 결말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리 넷이 서로에게 나무가 되어줄 수 있는 합이 잘 맞는 사이라는 말은 지금까지도 부적처럼 남게 되었다.


그 후에도 두 번 사주를 봤고, 이직이나 팀이동 등 삶의 변수를 마주했을 때였다. 특정한 틀 안에서 해석이 변주되는 사주의 내용이 어느 정도 예측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엔 타로를 보러 가기도 했다. 들은 얘기를 신뢰한다기보다는 누구도 단호하게 말해줄 수 없는 내 미래에 대한 얘기를 타인의 입에서 듣는 것이 즐거웠던 듯하다. 지리멸렬했던 이십 대에 듣는 내 미래의 한 시점에 실현된다는 확고한 성공은 현실을 버티는 동아줄이었다. 41세와 44세, 54세에 결실을 맺는다는 말은 달콤했고..! 그 당시에는 너무도 멀다고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정말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근래에 본 적도 없는, 난데없는 사주썰을 길게 풀게 된 것은 오늘 본 애니메이션 <엘리멘탈>과 관련이 있다. 타인에게서 언뜻 묻어나는 사랑의 향을 맡아 내며, 원소들의 궁합을 봐주는 주인공의 엄마는 사랑하는 이를 내치려는 주인공에게 말한다. 너희의 사랑은 완전하다고. 샤머니즘이 불과 물의 사랑을 완성시켜 준 것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살아가면서 갈등을 겪어나갈 때마다 엄마 말을 떠올리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더 관계를 돌아보도록 만들어줄 든든한 심지가 되어줄 수도 있고 말이다. 누구에게나 확언이 필요한 순간은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한창 그랬듯, 내 주변의 누군가도 자신이 아닌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장밋빛 미래에 대한 단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야, 올해는 백말띠는 무조건 잘된대”, “액땜했나 보다”, “아니 진짜 대운 들어온 거 같은데?” 샤머니즘을 타고서라도 시련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듣고 싶은 그 말을 건네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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