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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land Jul 10. 2023

내가 ‘우리’가 되는 순간


요즈음의 나는 보통 ‘나’로 지내고 아주 가끔 ‘우리’가 된다. 지금보다는 쉽게 ‘우리’가 되어 지냈던 시절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어느 순간 나는 노력해야 겨우 ‘우리’의 모습을 갖출 수 있다.


출근길의 나의 경우는 그저 ‘나’이다. 여기에는 일말의 빈틈도 존재하지 않아 우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더 이상 늦을 수 없는 데드라인에 맞춰 길을 나서는 나에게 출근길은 하나의 미션이다. 지하철 노선도를 살피고, 환승 시간을 헤아리며 바삐 발걸음을 옮겨야 겨우 도착 시간을 맞출 수 있다. 주변에는 나와 같이 출근하는 사람들이 한가득인데, 모두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갈 뿐이다. 주변에 누가 있는지 돌아보기에는 갈 길이 바쁘다.


출근하고 일을 하면서 ‘우리’가 되어야만 하는 시간들이 있기에 모두가 애를 쓰지만 어느새 곧잘 다들 ‘나’로 바삐 돌아온다. 아니 사실 지금 나로 돌아왔는지도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냥 사실, 우리가 될 시간이 없는 것이다.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에 휩싸여있기에 나에게는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출근이 있고, 퇴근이 있고, 그리고 지난한 출퇴근 길이 있고, 또 그 사이를 파고드는 허기짐과 졸림은 또 어떠한지.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을 보내며 ‘나’로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문득 다가온 계절을 감지하듯 ‘우리’가 된 순간을 목도하는 것이다.


보통 나는 영화관에서 ‘우리’가 된다. 사람이 많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미술관에서 수많은 인파 속에 휩쓸려 그림을 감상할 때도 나는 항상 ‘나’ 일뿐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의 벅차오름은 나 혼자 소화해야 할 종류의 것이고, 그렇기에 후에 누군가와 나누는 감상은 보통 정제된 감상이다. 그런데 영화관에서는 좀 다르다. 근래에 <이니셰린의 벤시>를 혼자 보러 갔는데, 나오는 길에 나는 옆자리에 앉은 분들과 친구가 된 기분이었다. 그분들은 동의할 수 없더라도 영화를 보던 당시 우리는 분명 ‘우리’였다. 쉴 새 없이 잽을 날리는 영화의 유머에 내 양 옆의 분들과 함께 같은 호흡에 피식 웃음을 내뱉으며 나는 지금 이 사람들이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어느 때보다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엘리멘탈>을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울컥하는 마음을 참다 눈물이 흘렀을 때 나의 옆자리 분이 누구보다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이입한 대상은 각기 달랐을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음은 확실했다.


가끔 바쁜 일상이 멈추었을 때 나는 ‘우리’가 되기도 한다. 한 주를 마무리한 고단한 금요일 저녁이었다. 대곡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곱시 이십오분에 도착 예정인 지하철이 8분 연착될 예정이라고 안내하는 기관사의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지하철 승강장 안전문 앞에서 다가올 열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맥이 풀린 듯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시간이 멈춘 듯 했다. 8분이라는 틈이 생기자 나를 둘러싼 주변의 사람들이 보였다. 한껏 세팅한 차림새와 다르게 지친 표정으로 권태로이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며 핸드폰을 바라보는 사람, 의자에 겨우 엉덩이를 밀어넣은 채 무거운 짐을 품에 앉고 연신 부채질을 하는 사람. 아아, 나 뿐만 아니라 저들도 오늘 꽉찬 하루를 보냈겠구나.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 ‘우리’가 되었다. 지금이라면 저 사랑스러운 이들을 한명씩 안아줄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연착된 열차는 도착했고, 나는 다시 내가 되어 열차에 탔다. 언젠가  저들과 다른 공간에서 ‘우리    있다고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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