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고 카렐 차페크는 말했다. 아직 나에게 작은 화단도 손바닥만 한 정원도 없지만, 그래도 화분들은 있다. 키울 재주나 여력이 많지 않기에 선택된 아이들은 보통은 생명력이 아주 강한 친구들이다. 온도와 햇빛에 민감하지 않은 무던한 친구들. 5년 전 직장 동료에게 받은 선인장은 한동안 나의 사무실 책상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집 베란다에서 쑥쑥 자라나고 있다. 한창 킥복싱에 빠져있을 때라 이름은 ‘권투’라고 지어줬는데, 어느새 몸집을 두배로 불렸다. 또 하나의 선인장은 나무 모양으로 손바닥에 올릴 정도의 작은 크기의 화분에 담겨 있는데, 작은 줄기가 삐죽 솟아나 몇 개월을 지켜보다 대체 정체가 무언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어느새 꽃을 피워내기도 했다.
이 친구들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혹시 나도 언젠가는 정원가라고 스스로를 칭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문득 새어 나온다. 아직은 아무래도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키우다 보면 언젠가는. 그럴 때면 나보다 먼저 정원가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춰본다. 내가 아는 정원가는 물론 많지 않은데, 그중 가장 오래전 존재했던 이는 에피쿠로스다. 쾌락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들의 철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음주가무와 같은 감각적인 쾌락이나 방종이라기보다는 고통의 부재, 평온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이 평온한 상태인 아타락시아를 추구하는 이들은 빵과 물만 있으면 신도 부럽지 않다고 말하며 정원을 가꿨다고 한다. 아테네 교외에 있는 정원을 가꾸고 책을 읽으며 ‘정원 공동체’를 만들었던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들의 마음을 직접 느껴보기 위해서는 직접 자연의 정원으로 떠나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산이 있고 강이 있는 교외로 떠나면, 비록 그곳이 내가 직접 가꾼 정원은 아닐지라도 자연이 가꾼 정원은 이런 모습이구나 하는 감흥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이미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자연 속에 앉아 있다 보면 정말로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 외의 공허한 욕망들을 더 쫓는 것이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 회의감이 들곤 한다. 나도 에피쿠로스학파처럼 정원 공동체를 하나 만들어 우정이나 철학을 추구하면서 산다면 고통 없는 상태인 ‘아타락시아’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절로 드는 것이다.
10월을 맞이하여 여름을 잘 보내주고, 가을을 맞이하며 자연이 빚어낸 아름다움을 잠시라도 품어보고자 제천에 찾아갔다. 아직 초록 빛깔인 월악산 산등성이에 가을을 예고하는 다채로운 색들이 자신의 존재를 내비친다. 굽이치는 길을 돌면 바다 같은 청풍호가 숲의 색을 반사해 녹색빛으로 반짝인다. 내가 욕망하던 초록색 카드지갑도, 위시리스트에 가득 담아 둔 갖가지 수영복과 수모와 수경들의 영롱한 색들도 이 앞에서는 빛을 잃고 만다. 자연 안에 있다 보면 무엇이 충분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물론 문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홀린 듯이 수많은 것들을 욕망하게 되지만 말이다.
다시 내 방의 화분을 들여다본다. 아주 작지만 숲에서 본 나무와 닮았다. 색상도 그러하고, 형태도 그러하다. 베란다에서 살짝 들어보면 볕뉘가 비친다. 내가 숲에서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나뭇잎 사이로 비친 볕뉘와 같다. 책과 정원, 그리고 철학과 우정만으로 정말 충분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