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은 항상 달다. 분명 저녁때 먹는 그 술이랑 같은 술일 텐데, 한 잔 들이켜고 나면 단 맛과 함께 몽롱한 기분이 든다. 아침 일찍 나와 달렸더니, 달리고 나서도 정오가 되지 않았다. 오전부터 문을 연 가게를 찾아 파전과 함께 막걸리를 주문했다. 한 잔 마시고 나니 이제야 겨우 진정이 된다. 영화를 보기 전에 무엇을 하지? 나에게는 밀린 일이 있었다. 신년을 맞이하여 가족들에게 신년 카드를 쓰려고 했는데 아직까지 쓰지 않았다. 교보문고에 들려서 가족들에게 쓸 카드를 사야겠다고 답하니 친구는 말했다.
“와, 지덕체를 갖춘 하루네”
지덕체라니. 분명 아는 단어인데 생소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도 그랬다. 그래서 네이버의 도움을 받아 다시 한번 되새긴 지덕체론은 1900년대 교육론의 핵심적인 세 가지 체제라고 한다. 참된 교육을 위해서는 지육과 덕육, 체육을 조화롭게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고등학교도 아니고 초등학교 때 훌륭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는 지덕체를 갖춰야 한다는 선생님들의 훈화말씀을 들은 기억이 언뜻 날것도 같은데, 이렇게 막걸리를 마시기 위해 잔을 기울이는 자리에서 그 단어를 들을지는 몰랐다.
지덕체론이 처음 제기될 때에는 지와 덕에 편향된 교육을 비판하며 체육의 가치를 강조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지금의 나에게 낯설다고 느껴졌던 부분은 ‘덕’이었다. 신년인 만큼 다양한 새해 계획을 세웠고, 성장하는 한 해를 위해 내가 세운 거의 모든 목표는 ‘지’와 ‘체’를 기르는 일이었다. 책을 많이 읽고 영화를 보며 교양을 쌓고, 글을 쓰며 글쓰기 능력을 기를 것. 달리기를 하고, 근육을 키우고, 턱걸이에 성공하는 등의 신체 능력을 기를 것. 고등교육을 끝마친 지 십 년이 되어가는 현재의 나는 덕을 쌓겠다고 목표한 적이 안타깝게도…. 없었다.
아니 잠시만 세상에. 나의 인격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선에 대한 의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하듯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어느 순간부터 잊었던 것 같다. 이기적이고 모난 부족한 모습은 나의 성격과 개성으로 치부하고,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인간은 누구나 다면적인 모습이 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해 왔던 것이다. 덕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지금껏 살아왔다니 새삼 나아갈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두려움이 문득 든다.
그날은 오랜만에 지덕체를 갖춘 하루였다. 건강한 신체를 위해 아침부터 달리기를 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영화 <괴물>을 보며 사회와 나 자신을 되돌아보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으니 말이다. 아주 간단한 신년 카드를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긴 편지를 썼다. 올해에는 타인에게 관대해질 수 있는 마음을 기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