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공원 유람기
여러분은 ‘여행에 가서 이것만큼은 꼭 하고 온다’는 게 있나요? 아니면 ‘여행 가서 해보니까 의외로 이런 것들이 재밌더라’ 하는 것 이라던가요.
저는 여행을 가서 현지 교통편을 이용하면서 사람들 구경하는 게 재밌고, 현지 마트나 편의점 구경하는 것도 좋아해요. 특히 편의점에는 같은 제품이라도 우리나라에는 없는 맛이 있어서 주변에 나눠줄 선물을 득템하기 딱이거든요. 아니면 저는 각 나라의 공원들을 돌아다니는 걸 즐겨요.
공원의 여유로운 분위기, 오후의 햇살, 우거진 녹음 사이로 부는 바람이나 풀 냄새가 주는 평화로움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런던 여행을 계획하면서도 랜드마크나 쇼핑거리 대신 공원 위주로 루트를 짰어요. 이 글에서도 런던 여행에서 들렀던 공원들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아, 그런데 하이드파크는 빼고요. 왜냐면 이미 너무 유명하니까!
여름 피크닉, 여기야 여기! 리젠트 파크(The Regent’s Park)
리젠트 파크는 영국 왕실 소유 공원 중 하나인데, 런던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처음 3박 4일간은 킹스크로스역 근처에 묵었는데 리젠트 파크는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역 바로 가까이는 아니라 버스를 타고 약 20분가량 가면 됩니다.
버스에서 내려서 5분 정도 걷다가 보면 황금빛으로 칠해진 공원 출구에 다다릅니다. 들어서면 바로 공원 안에 흐르는 운하와 수면 위를 헤엄치는 물새들을 볼 수 있어요. 간혹 과자 부스러기라도 던져줄라 치면 금세 모여들더라고요.
5-6월 즈음이면 장미꽃이 만발할 때라, 공원 중앙에 있는 ‘메리 여왕의 정원(Queen Mary’s Garden)’이 장관을 이루는 시기예요. 거기가 바로 리젠트 파크 여름 뷰포인트입니다.
제가 갔을 때는 다행히도 해가 쨍하게 뜬 맑은 날이었어요. 정원 가득 수 십 가지 종류의 장미가, 수 백 수 천 송이로 피어 온통 향기를 뿜어내는 모습이 아직도 선명한 그림처럼 머릿속에 남아있어요.
공원이 굉장히 커서 출입구도 여러 곳에 있으니, 공원 내 동선을 짜고서 첫 코스에 가장 가까운 출구로 구글맵을 찍고 이동하는 것을 추천해요. 저는 장미 정원을 제일 먼저 보고싶었기 때문에, 킹스크로스역에서 버스를 타서 셜록홈즈 뮤지엄 앞에 내렸어요.
공원 내 곳곳에 유료로 대여할 수 있는 접이식 의자가 있지만, 잔디밭에 누워 여유를 즐기기 위해서는 돗자리를 꼭 챙겨가세요. 그리고 비가 좀 오락가락 하니까, 변덕스런 런던 날씨에 대비해 구름이 있는 날은 우산도 잊지 마시고요.
야경 분위기 갑! 프림로즈 힐(Primrose Hill)
프림로즈 힐은 리젠트 파크 바로 북서쪽에 붙어있습니다. 프림로즈 파크가 아니라 힐(hill)인 이유는 공원이라기보단 완만한 언덕이기 때문이에요. 지하철 역에서는 꽤 거리가 있어서, 어딘지 모르게 부유해 보이는 건물들이 늘어선 조용한 동네를 걸어 15분 정도 지나니 프림로즈 힐의 담장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프림로즈 힐은 공원에서의 오수보다는 런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야경 포인트로 유명한 곳이에요. 그래서 저도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에 맞춰, 그러니까 오뉴월의 런던이라면 8시쯤 되는 시간에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어요.
정상에 오르니 이미 사람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 있더라고요. 그다지 경사가 가파르지 않았는데도, 꼭대기에서 런던 랜드마크들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침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빌딩들이 빛을 받아 붉게 타올랐어요. 어울리는 BGM까지 선곡해왔으나, 아쉽게도 블루투스 스피커를 깜빡해서 핸드폰으로 자체 플레이.
하루의 여행을 마무리 하며 보는 노을은 또 느낌이 다르더군요. 지나가는 순간이 아까워서일까 묘하게 슬프기도 하고, 언덕 위를 스치는 바람이 생경해 설레기도 하고요. 같이 갔던 일행과 사진을 찍는데, 아마 지금 이때를 나중에 가서도 오래도록 추억하게 되겠구나 하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참, 공원 주변에는 상점이랄 곳이 별로 없기 때문에, 지하철 역 인근에서 공원에서 간단히 먹을거리를 사가면 좋아요. 제 픽은 테스코표 샌드위치, 샐러드와 납작 복숭아. 납작 복숭아가 특히 말도 안되게 싼데, 6개 들이 봉지 하나가 1파운드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해가 지고 난 뒤엔, 근처 캠든타운의 펍에서 맥주 한 잔 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뷰 포인트 가득한 큐 가든(Kew Gardens)
제가 프림로즈 힐 야경 다음으로 벼르던 곳이 큐 가든이었다는 사실. 정확히는 런던이 아니라 근교에 있는 왕실 소유의 정원입니다. 무지하게 크기 때문에, 넉넉히 다 둘러 보려면 하루는 잡고 가야해요. 그렇지 않다면 미리 둘러볼 곳들을 찍어놓고 가는 것이 발품과 체력을 아낄 수 있는 팁이 되겠네요.
저는 미리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티켓을 구매해 갔어요. 그러면 좀 저렴하게 살 수 있는데 기간 따라 가격은 조금씩 차이가 나는 모양입니다. 저는 큐 가든 공식 웹사이트에서 16.5파운드(한화 기준 약 26,000원)에 결제했고, 메일로 발송된 QR코드를 보여주고서 입장할 수 있었어요.
들어서자 마자 챙긴 것은 공원 지도였습니다. 큐 가든에 간 이유는 공원 안에 있는 큰 온실 두 개였거든요. 제가 또 온실을 좋아해서요.
첫번째로 간 곳은 입구에서 거의 직선 코스로 3~4분 거리에 있는 ‘Palm House’라는 이름의 온실이었습니다. 아마도 열대 식물들을 모아놓은 곳 같았는데, 과연 들어서자마자 훅 하고 습기를 머금은 열기가 느껴지더라고요.
예전에는 식물원이나 온실 하면 동물원이 있는 유원지를 갔을 때, 시간 나면 보고 오는 곁다리 코스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온실에 들어서면 느껴지는 축축한 공기와 미묘한 지하실 냄새나, 안에서 울려 퍼지는 관람객의 조용한 목소리 같은 게 좋아서 부러 찾아 다니곤 합니다.
1층을 거닐다 보면 2층 난간으로 올라가는 소용돌이 계단이 있으니까 놓치지 말고요.
다 보고 나서 뒷문으로 나오면 장미가 가득 핀 뜰이 있어요. 거기서 좌측으로 꺾어서 조금 더 걷다 보면 다른 온실이 나옵니다. 지도 상에는 ‘Temperate House’로 표시되어 있을텐데, 먼저의 온실보다는 약 서너배 가량 컸어요.
사실…식물에 대한 설명 하나하나 읽어보기에는 영어가 짧고 풀꽃들은 너무 많아서, 실내 공원에 온 셈 치고 벤치에 한참 앉아 있다가 2층 난간을 따라 온실을 한 바퀴 돌고만 왔지만, 거대한 테라리움 속 미니어처가 된 기분이라 속으로 좀 웃음이 나더라고요.
물론 공원 내에 다른 볼거리들도 많아요. 지금 소개 한 두 개 온실은 공원 전체 규묘의 1/10도 아마 안될 거예요. 비가 내리는 날이라 금방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게 여전히 많이 아쉽네요.
점심 나절에 맞춰 큐 가든에 간다면, 근처 뉴언즈 티 하우스(Newens Tea House)에서의 티타임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100여 년이 넘는 오랜 역사의 티 하우스인데, 15파운드면 스콘과 샌드위치, 케이크와 홍차가 3단 트레이 가득 담겨 나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제가 네 번이 넘게 애프터눈 티를 마셨었는데 그 중 어느 곳도 스콘과 타르트는 여기를 따라오지 못해요. 영국 노부인이 고양이와 함께 뜨개질을 하며 졸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어울리는 아기자기한 실내 인테리어도 영국에 온듯한 느낌이 물씬 든답니다.
유명 관광 스팟을 따라 바쁘게 움직이는 날도 그 나름대로 부지런 떠는 보람이 있다면, 하루 정도는 과감히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이웨이로 움직이는 용기도 필요한 것 같아요. 여행의 즐거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거든요. 꼭 런던이 아니더라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만 한 번쯤 나만의 주제를 정해서 가보는 건 어때요?
계획하고 있는 나만의 여행 테마가 있다면, 공유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