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비를 꽤나 좋아해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비 오는 날 좋아해. 소리도 좋고, 햇빛이 강하지 않은 것도 좋고, 사실 그냥 좋아."
"뭐?"
나는 보통의 이유로 비를 싫어하는데, 그런 내 눈에 그들은.. 너무.. 너무..
'뭐야 그거.. 정말 멋있다'
멋진 것이다!
그 당시 나에게 비를 좋아하는 척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때 내 눈에는 남들이 싫어하는 것들의 장점을 꼬집어서 사랑하는 그 모습이 진짜 캡숑 멋져 보였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비를 사랑하고 싶어 졌다!
누가 사랑을 노력으로 하나요, 싶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가능한 사람이다. 정말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은 절대 사랑할 수 없겠지만 무관심을 사랑으로 바꾸는 것 정도는 노력으로 가능하다!
먼저 비 오는 날을 사랑하는 친구의 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비 오는 날 좋아해. 소리도 좋고, 햇빛이 강하지 않은 것도 좋고, 사실 그냥 좋아."
소리가 좋다고 했다.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토독토독 톡톡 삼겹살 굽는 소리 같기도 하고, 속이 빈 유리구슬이 굴러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삼겹살을 생각하니, 비 오는 날을 조금은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쉽나?
사람마다 유난히 발달된 감각기관이 있다. 나의 경우에는 시력은 안 좋은 편이고, 청력은 예민하고, 촉각과 후각이 굉장히 좋다. 쉽게 말해서 개코다! 일기예보를 보지 않고도 창문만 열면 비가 오겠군. 하고 우산을 챙길 수 있다. 비오기 전의 녹진하게 습한 구름 냄새들을 맡을 수 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길가의 냄새들이 씻겨 내려가서, 청량하게 정돈된 냄새만 남는다.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우산이 귀찮다고 말한다. 동의한다. 사람 손이 두 개인데 요즘 우리들은 두 개 이상의 너무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어야 하는데.. 우산을 손 하나는 기능을 상실한다. 이 부분은 어느 정도의 감성과 장비빨이 아니면 커버가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나는 비 오는 날을 사랑하기 위해 우산을 사기로 했다. 어떤 우산을 사는 게 좋을까. 나의 조건은 튼튼하고, 만듦새가 좋아서 오래도록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하나였다. 사람마다 다른겠지만 나는 물건을 오래 관리하면서 쓰면 애착이 생기는 타입이다. 새로운 물건도 좋지만 역시 오래 쓰면 쓸수록 뿌듯하고 애정이 깃든다.
조금 돈을 들여서 견고한 빨간 장우산을 샀다. 빨간색 우산은 어릴 때부터 낭만적인 이야기의 상징물이었다. 메리 포핀스의 우산, 토토로의 우산 같은 것 말이다. 오래 쓸 수 있는 장우산, 비 오는 날이면 그 친구랑 나갈 생각에 기분이 썩 좋다.
나의 경우 비가 싫었던 가장 큰 이유는 신발 속으로 물이 들어갔을 때 너무 찝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발에 물이 안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닌가. 장화를 신는 게 무엇보다도 좋을 것이다. 장화를 마련했다.
장화의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면 필요한 순간에 신기 애매하다는 데에 있다.
정장에 장화를 신으면 좀 웃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찝찝하게 젖은 양말과는 안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화는 비를 사랑하는 데에 일조했다. 장화를 신은 날의 나는 물웅덩이 앞에서도 용감하다!
대중교통을 피하는 게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무언가를 사랑하는 데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사랑이 쉬운 줄 아는가? 나는 비를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입장으로서 비 오는 날 만큼은 택시나 자가용을 이용한다. (물론 필자는 면허 없는 대학생이라 비 오는 날 차 막히는 답답함이나, 운전자의 피로함 같은 건 모른다..)
이건 내가 비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든 가장 큰 부분이다. 비 오는 날 집에서 따뜻한 차 한잔 우려 놓고 감성적이게 책을 읽으며 빗소리를 즐기는 거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며 물 멍하거나 우산 쓴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알록달록한 우산들의 행렬을 구경하는 것도 좋다. 비 오는 날을 피해서 약속을 잡는 등의 약간의 센스만 더해도 비를 사랑할 수 있다.
사랑에는 언제나 장애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고전 중의 고전인, 로미오와 줄리엣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혈통적 장애물, 관계적 장애물(네가 내 원수의 아들/딸 이라니!) 현대에는 사회적 약속으로 인해 비가 오는 아침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그럴 것이다. 그래도 나는 멋진 우산을 들고 장화를 신은 채로 택시를 타고 있노라면 코를 크게 벌름거리면서 비 냄새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사랑하기 위해서는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하다. 비가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비가 언젠가 그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비 온 뒤에 촉촉해진 화단을 볼 생각을 하면 비가 조금쯤은 좋아 질지도 모른다. 보려고 하면 보인다.
그래서 지금 비를 사랑하는지?
사실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우리는 아직 썸 타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좋아하긴 하는데, 여전히 맑은 날에 더 신나 하는 내가 있다. 뭐 적어도 비 오는 날 우울하진 않으니 이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은 이렇게 말할 정도의 관계는 된다."나, 비를 꽤나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