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의사시네요!

그림을 덧 그리는 마음

by 해구

일요일 밤에는 교양 시험 준비한다고 새벽에 깨어있는 바람에 3시간도 못 잤다.게다가 시간표가 빡빡해서 점심은 쿨하게 거르는 월요일이었다.


내가 몇 시간 잤는지, 비가 오던지 말던지, 학원은 열리고 고3들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선생님인 나도 학원에 가야 했다.


너덜한 몸과 정신을 이끌고 어눌해지는 혀에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교실 안을 배회했다. 내가 지쳤기 때문일까, 고3들도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그 와중에 그림은 그려야 하니 손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대견하고.. 대견하고.. 피곤했다. 이날은 비교적 특별할 거 없는 날이었지만, 실기력이 부족하던 친구가 갑자기 잘 그리게 되어서 굉장히 놀랐고, 반대로 학원에 온 지 2달이 안된 학생 P의 한숨소리가 너무 잘 들렸다. P는 고3 3월에 미술을 시작한 용기 있는 학생인데, 그림을 그릴 때마다 19살이나 됐는데 이렇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고통스러워했다. P는 청소년기에 겪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난관 중 하나를 겪어내면서 몸이 맘대로 안 따라주는 매일을 직면하는 중이었다. 고3들도 뭐든지 처음 할 때는 힘든 법인걸 알지만, 그래도 힘들다.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되니까. 그 버거운 느낌을 나도 잘 알고 있다.'이게 맞나?' 싶은 불안한 마음이 들면서 근본 없는 불안감이 찾아오는 그거. 나는 지금도 여전히 매일 잘하고 싶은데 안 되는 느낌을 받지만, 지금은 고등학생 시절보다는 잘 갈무리할 수 있다. 내 입시미술 경력은 재수 시절을 포함해서 약 5년이고, 선생님으로서는 2년 차인 약 7년 차 입시 미술인이다. 7년이라고 하니까 참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나는 내가 처음 그렸던 정사각형의 상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잘 그리고 싶어서 주말에 학원 문을 열고서 그린 쭈글쭈글한 파란 종이컵 5장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아무 못 그리던 시절을 기억하는 건 나에게 도움이 된다. 그 종이컵들을 떠올리면, 정말 잘 그리고 싶어서, 언젠가는 잘 그릴 수 있겠거니, 하는 막연함으로 이어온 시간들이 선명하게 의미 있는 시간들이 된다. 이 경험을 시작으로 처음 하던 고깃집 알바를 1년간 버틸 수 있었고, 플랭크를 3분대로 끌고 올 수 있었으며, 3시 간자 고도 9 to 10을 견디는 작은 대학생이 됐으니까. 이렇듯 시작은 늘 버겁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꽤 괜찮네? 싶은 순간이 온다는 걸 경험으로 학습했으다. 그래서 괜찮아진다는 걸 아니까, 학생들이 못 그리는 것도 괜찮다고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다. 분명 언젠가는 꽤 괜찮아지니까. 나는 그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잘 알고 있으니까, 잘 도와줄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체감상, 사람의 성장에 필요한 것이 10개 있다면 근본적으로 학생들은, 10개 전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애석하게도 그렇다. 선생님은 그 10개가 어디 언저리에 있는지 살짝 등을 밀고 당겨주는 게 고작인 느낌이다. 사실 정답을 알려주는 건 너무 쉽지만, 그만큼 참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입 밖으로 나오는 말도 결국 '내가' 길을 헤매면서 찾아낸 '내 언어'로 이루어진 정보 값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복잡한 암호처럼 들릴 테다.


솔직한 아이라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소심한 아이라면 "아.. 네."

진짜 모르겠는 아이라면 "한번 해볼게요."


진짜 아는 거 확실해? 이해했어? 한번 더 설명해줄까?


내가 알려준다고 해서 그 정보가 학생의 세상에 정확한 정보 값으로 편입되지는 않는다. 이래서 교육학이 있고 전문가들이 있구나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학생들이 스스로의 정보 값을 최대한 많이 찾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만큼 덜 헤매도록 돕고 싶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의 그림에 손을 대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물리적 난이도가 어려운 게 아니라, 내가 손봐주면 학생은 우와~ 하고 오늘 수업은 기분 좋게 끝날뿐이라서 그렇다. 어떤 버거운 지점이든 혼자서 낑낑대는 시간이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일은 언제까지 얼마나 고민하게 두고, 언제 등을 밀고 당길지를 재는 일이다. 오늘은 참, 고민하게 둬야겠다 싶은 학생이 많은 날이었다.


수업시간이 10분 정도 남은 시점에 교실을 둘러보니 다들 지쳐서 집 갈 생각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도 집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애들 얼굴을 훌어보는데, 한자리가 유난히 오래 비어있었다. P의 자리였다. 나무질감 원기둥을 그리는데 낑낑대던 모습에 마음이 불편했는데.. 너무 버거웠나 보다. 그냥 내가 손을 봐줄걸 하는 생각이 들어서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서 붓을 잡았다. P의 원기둥에는 물이 너무 많고, 물감이 적어서 종이가 울고 있었다.


S:선생님 종이가 울어요!

T:달래줘.


익숙한 농담이 떠올라서 속으로 살짝 웃고 붓으로 물감을 개어냈다. 아직 농도 맞추는 게 어렵구나. 언제 갔을까? 옆자리 재수생에게 얘 언제부터 없었는지 아냐고 물어봤다. "글쎄요. 튀었네요!" 하는 지친 얼굴을 보니 너도 참 고생이 많다, 싶었다.

텅 비어있는 원기둥에 물감을 채우면서 P의 한숨소리를 떠올렸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서투른 건 당연한데.. 아휴 이놈의 입시.. 같은 푸념을 하면서 P 마음이 꺾인 건 아닐까 걱정이 됐다.

울고 있는 종이를 달래가며, 물감으로 양감을 내고, 삐져나온 외곽을 정리했다. 담백하게 무늬를 넣어서 내일은 P가 괜찮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교실 입구의 P와 눈이 마주쳤다.


오, 튄 게 아니었구나. 아니면 튀었다가 돌아온 건가?

몰래 만진듯한 그림이 신경 쓰였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P는 얌전히 자리에 돌아와서는 그림을 한참이나 내려다봤다. 그 표정을 읽을 수가 없어서 왠지 불안해졌다. 어.. 혹시 마음대로 그림 건드려서 기분이 별론가? 어떡하지 달래줘야 하나??

다급함을 숨긴 채 P에게 말을 건넸다.

"그림에 별로 손 많이 안 댔어."

중간면 채운다는 게 이런 거야. 몇 터치 안 넣었어! 그냥 중간면이랑 무늬 조금만..

내 말을 듣는 내내 P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해 보여서 나는 큰일 난 건가 싶었다.

P는 입을 양손으로 가리더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의사시네요!"

진짜 다른 그림 같다고, 감사하다고 했다.

크게 불안해하다가 감사인사를 들어서 그런지 내 리액션이 고장 났다.

"아니야 아니야 진짜 손 얼마 안댔어. 중간면이 어쩌고 무늬가 어쩌고..."

내 중언부언 말을 듣던 P는 활짝 웃었다. 그 얼굴을 보니, 속이 조금 쓰렸다. 아이고 수업시간 내내 많이 힘들었구나. 오늘 내가 재던 타이밍은 실패였나 보다.


몇 가지를 물어보던 P는 내 말을 듣고 난 뒤에 또 "감사합니다." 했다.

나는 연신 아냐 아냐. 했지만 집에 오는 길에 더 완강하게 아니라고 할 걸. 하고 후회했다.

내가 학원에 나오는 이유가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인데. 나는 돈 받는데. 알바인데.. 돈 말고 다른 걸 잔뜩 받은 기분이 들어서 왠지 미안했다.


고맙다고 해줘서 고마워. 내일은 더 잘할게. 내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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