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펀지를 그리며 하는 말
-선생님, 저는 꿈이 있어요.
-어, 뭔데? 말해봐. 나 그런 거 좋아해.
-저는 떡집을 할 거예요.
비가 찝찝하게 내리는 날이었고, 수업이 끝난 뒤에 회식으로 양고기를 먹을 생각에 신나 있었다.
학생들은 시험 치느라 묘하게 팽팽한 분위기였는데, 한 테이블에서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고3들이 있었다.
그 종이에 그려지는 물건은 노랗고 초록색인 스펀지였다.
아... 미술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종종 고통스러워지는 순간은 이런 것이다. 스펀지... 사실 스펀지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입시적으로 생각하면 뭐하나 빠짐없이 중요하지만, 한 발자국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런 건 정말.. 스펀지의 비율이니, 형태니, 톤이니 양감이니 하는 것들은 정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이니까. 스펀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지.
여러분은 '스펀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나 역시 입시미술 전까지는 그.. 하얀 실험맨들이 나와서 리빙포인트를 알려주는 예능프로그램 말고는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입시미술을 해본 사람이라면 분명 스펀지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갖고 있다..(기묘하다.) 폭신한 노란색에 거칠거칠한 초록색 부분이 1:3 비율로 붙어있는 그 녀석은, 디자인 입시에서 반드시 그려봐야 할 기출이다. 이 스펀지를 그릴 때 생각해야 하는 게 굉장히 많지만(놀랍게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드로잉 -폭신하게 눌려지는 형태
색감- 예쁜 노란색
균형-같이 조합되는 개체와의 대비
완성도-스펀지 구멍의 크기, 간격, 물감의 농도
스펀지의 노란 부분은 굉장히 부드럽고 폭신한 반면 초록색 부분은 이 녀석 사포인가, 싶은 거칠기이다.(실제로 금속을 연마할 때 사용한다고 한다.) 그 질감의 차이를 표현해 줘야 한다. 그리고 색감. 노랗게 예쁘지만, 각이 확실하게 잡혀있는 예쁜 색감! 이것은 몇 번이고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노란색은 다들 쓰기 어려워하는 색이다. 밝게 그리려면 하얗게 떠버리고, 톤의 단계를 잘못 내다간 오렌지색이 되거나 갈색으로 타버리기 쉽다. 한번 감을 찾으면 이만큼 쉬운 색도 없지만, 이 감이라는 게... 기다린다고 오지는 않는다.
그림이라는 게 어느 정도는 스타일이라는 게 있어서, 사람마다 색 조합은 다를 수 있지만 나는 아래의 조합으로 가르치고 있다.(p.m=퍼머넌트)
p.m옐로+화이트/p.m옐로/p.m옐로 딥/p.m옐로 딥+오우 커/오우 커/로우 엄버/로우 엄버+시엔나/시엔나+세피아
이렇게 쓰다 보니 대체 스펀지의 노란색이 뭐가 중요한가 싶지만, 입시미술 하는 고3은 스펀지 하나를 꼼꼼히 뜯어서 분석하는 게 일이다.
아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건 스펀지 표면의 구멍을 그리는 일인데, 이게 잘못하면 환 공포증 없는 사람도 보기 힘들 정도로 징그럽게 표현된다. 아니나 다를까, 학생 K가 열심히 구멍이 와다다다 뚫린 스펀지를 그리고 있길래 조심스럽게 의자를 끌고 와서 옆자리에 앉았다.(학생 옆자리에 앉는 건 뭐랄까, 학원에서 무언의 약속 같은 겁니다. "내가 니 그림을 손봐도 괜찮겠니?" 하는 신호!)
"스펀지 어렵지?"
"그냥 저는 얘가 싫어요."
울상이 된 채로 점만 따닥따닥 찍고 있는 K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선생님 경력이 길지 않아서 좋은 점은 학생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다는 것이다. 내가 스펀지를 처음 그렸을 때, 정말 똑같이 힘들어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래서 어디를 모르는지도 잘 알고 있다.
"스펀지 표면에 구멍은 너무 작고 많으니까 징그럽고 그리기도 힘들지? 크기 차이를 다르게 주면서 간격 차이를 주면 쉬워. 많이 그리지 말자."
사실 이렇게 말해도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K도 관성적으로 끄덕이기는 했지만,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공허한 눈이란. 여러분도 무슨 말인지 모를 것 같다. 하하하(이 부분은 언젠가 글로 풀날이 올 것 같습니다.)
묵묵히 붓을 잡고 구멍을 대중소... 간격도 대중소... 그려나갔다. 그리고 붓끝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K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저는 꿈이 있어요."
오? 갑자기?
오늘은 진로이야기인가. 내가 아는 분 중에도 꿈이 있다고 외치는 청소년이 계신데. 현실에서 들으니 대단히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이 나를 웃기는 부분 중에 하나는 이거다. 맥락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던지는 거! 선생님 옆에만 가면 이때다! 하고는 타이밍을 낚아채서 하고 싶은 말을 조곤조곤 재잘거린다. 나는 이런 거 참 좋아한다.
"어, 뭔데? 말해봐. 나 그런 거 좋아해."
"저는 떡집을 할 거예요."
떡집? 왜 떡이지?
K는 씩 웃더니 상상에 빠진 눈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먹고 싶은 떡이 있거든요. 그런데 잘 안 팔아서요. 나중에 시골에 집을 하나 얻어서, 떡집을 여는 거예요. 제가 먹고 싶은 떡을 만들어서 팔 거예요."
제법 구체적인 목표도 있어서 신기했다. 그래서 꼬치꼬치 캐물었다.
"먹고 싶은 떡이 어떤 건데?"
"초코 백설기요."
그런 생각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입니다. '굉장히 많은 금손들이 초코 백설기를 만들어 주시지 않나?' 하는 생각이요.
"그리고 또?"
"송편인데, 안에 초코가 들어있는 거요."
'얘는 떡보다는 초코를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눈앞의 K책상 한구석에 쌓인 초콜릿 껍데기들을 보면서 초코를 좋아하는 게 확실해졌다.
"지금 인터넷에 파는 떡들로는 안 되는 거야?"
"제가 만들 거예요."
그 결의에 찬 눈이란. 얼핏 보기엔 지쳐서, 귀농하고 싶다고 하는 회사원과 비슷해 보여서 마음 한구석이 근질거렸다. 그리고 맛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애가 그린 그림들은 많이 봤지만 애가 만든 떡은 먹어본 적이 없으니, 미래에 얘가 만들 떡이 기대됐다.
"떡집 차리면 연락 줘. 정기적으로 주문해먹을게."
"오! 좋아요. 할인해드릴게요."
"제자한테 할인받는 선생님이라니 너무 최고다."
떡집 사장님이라니, 살면서 들은 꿈들 중에 손꼽히는 멋진 꿈이다. 이 꿈이 변하든 변하지 않든 K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어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스펀지 구멍을 그리면서 내 팔순잔치 떡을 초코 백설기로 해도 괜찮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스펀지는 제가 다 그렸지요. 하하!
그 뒤로도 K는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는 부산 가서 밤까지! 친구랑 놀고 싶어요."
"하루 날 잡아서 놀아보면 어때?"
"아니, 성인이 된 뒤에 한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인증한 사람으로 술을 마시고 밤가지 노는 게 중요하다고요."
"그럼 지금은 나라에서 인증하지 않는 청소년인 거야?"
"그렇죠."
깔깔깔 나도 그랬었던 기억이 난다.
"저는 친구랑 어른이 되면 같이 살 약속도 했어요. 나이 들어서 둘 다 혼자면 같이 살 거예요."
아. 나도 그런 약속을 했었는데! 고3 내내 같이 살 집에 어떤 것들로 채워놓을지 이야기했었지. 제법 몽글몽글한 마음이 되었다. 역시 사람은 같은 듯 다른 게 정말 개성적이고, 멋지다! 이렇게 다른 너희들에게 똑같은 스펀지를 그리는 법을 알려주는 게 맞는지, 복잡한 마음이 든다. 답은 여전히 찾고 있다. 나도 자라는 중이고, 찾아가는 중이라서 미래의 떡집 사장님을 보면서 나는 뭘 하고 싶었더라, 하고 생각하는 밤이었다. 물론 수업이 끝난 후에는 양고기를 먹으며 아 너무 맛있다! 하고 생각해 버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