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 않은 사람

특별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by 해구

그날은 성취에 매몰되는 날이었다. 수능과 입시를 겪으면서 알게 된 것은 스스로의 성취나 행위의 결과가 곧 나의 가치와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100점을 받으면 훌륭한 성취를 한 것이고, 80점을 받으면 딱 그 정도의 성취를 한 것이다. 100점을 받았으니 내 가치가 올라가거나, 80점을 받았다고 내가 80점짜리인 게 아니다. 성취와 나라는 사람을 분리하는 법을 입시를 통해 배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날들은 성취에 좌우되지 않는데.. 나는 끊임없이 노력했고, 애써왔지만 평가자의 "이거 다시 해야겠는데?" 한마디에 물거품이 됐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느꼈고, 마감일까지 작업을 완수하지 못했다. 조금 풀이 죽은 나는, 하루 일정을 완전히 펑크내고 온종일 누워있었다. 오전 7시에 일어나서 오후 6시까지 누워서 과자나 씹었다. 하루 종일 누워있는 내가 어이없어서, 6시 즈음에 책 한 권과 과제들을 들고 근처 카페로 갔다.





요즘 거대한 학교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게 지쳐서 공유 킥보드를 열심히 이용하고 있다. 그날도 킥보드를 타고 근처 카페를 갔었다. 카페에서 3시간 정도 있었나, 이날은 목요일이었고 며칠 뒤인 토요일에 부산에서 열리는 겨울 서점 김겨울 작가의 북 토크를 즐기기 위해"아무튼, 피아노"를 읽기로 했다. 과제를 위해 테이블이 있는 실내에서 읽을까, 녹색이 보기 좋은 테라스에 앉을지 고민했다. 처음에는 과제를 생각하며 실내에 앉았지만 카페 내부는 음악소리가 너무 커서 곤란했다. 음료를 받아 들고 테라스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김겨울 작가의 "아무튼, 피아노"는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진솔한 글이었다.('아무튼,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도 따로 작성하게 될 것 같다.)


KakaoTalk_20220627_002608089.jpg 테라스 자리

책을 읽는 동안에 옆자리 팀이 3번 바뀌었는데, 첫 번째는 조용한 남녀 커플이었고, 두 번째는 활발한 두 명의 여성분들이었다. 카페에 유치원생 정도의 아이들 두 명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놀고 있었는데, 두 여성분은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기도 하고, 사진을 찍으며 노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세 번째 팀은 퇴근 후에 카페에 방문한 듯한 남녀 혼성 4명이었는데, 어른의 대화를 하는 것 같아서 속으로 응원했다. 책은 좋았고, 날씨도 그럭저럭 덥지 않아서 좋았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탁 트인 느낌이나, 시야를 가득 채우는 녹색의 식물들이 행복했다.

카페의 밀크티가 맛있어서 금세 마셔버리고, 아보카도 망고 셰이크를 하나 더 먹었다.(이건 좀 미묘했다.) 그렇게 책 한 권을 읽고 과제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사실 집 갈 때쯤에는 그런 사실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밤공기가 너무 좋았고, 밤 산책을 하는 강아지들이 행복해 보였다. 나도 이 밤을 즐기자 싶어서 걸어가는데, 신호등 앞에서 한 할아버지가 킥보드를 타고 정육점 사이의 골목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봤다.


KakaoTalk_20220627_002855108.jpg 킥보드 타던 할아버지를 그림. drawing by me


엄청 힙하고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이게 행복인가 싶었다. 집 가는 길에 이런 풍경 속에 들어가고, 행복을 느끼는, 이런 게 내 행복이구나. 그리고 담담하게 인정하게 됐다.


"나는 특별하지 않구나."


나는 과제를 미루고, 뭔가 잘 안 풀리고 능력이 부족해서 낑낑대는 날들에 잔뜩 지쳐도, 책 한 권과 몇 시간만 카페에 있어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건 참 특별하지 않고, 굉장히 좋잖아?


어린 시절부터 나는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된 내 모습을 떠올리면 여기저기서 나를 찾고, 나를 부르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결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건 굉장히 특별하고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하던지, 그런 역할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재미있게도, 최근에 생각에 변화를 준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시에서 운영하는 창업 프로젝트에 추천으로 참가했다가 덜컥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이 일을 진행하면 너무 많은 것들을 해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참가하고 싶지 않았는데, 등 떠밀려서 신청한 프로젝트에 선정돼서 너무 당황스러웠고 상상 이상으로 버거웠다. 나는 한국에 그렇게 많은 연구소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고, 운전면허 없는 대학생은 그 깊숙한 산골, 그 먼바다 끄트머리까지 찾아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물밀듯이 들어오는 일거리와 내가 선택해야 하는 수많은 것들이 이번 학기에는 정말! 정말! 너무! 버거웠다!!(진심으로 힘들었으니 느낌표를 잔뜩 사용한다.) 절대 절대 혼자서는 내 전공 발표도 챙기고 사업 pt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는 선배들이 커버해주고, 일부는 교수님이, 일부는 외주를 맡기면서 진행했다. 나는 엄청 바쁜 와중에도 늘 불안했다. 전부 내 일이고, 내 발표인데, 다른 사람이 해준다고? 그게 가능한가?? 어차피 내가 할 수 없는 스케줄이었으니 선택지가 없어서 불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진행하면서도 전공 과제를 하는 내내 내가 해야 하는데 스스로 해내지 못한다는 것들에 힘들어했었다. (뭐 물밀듯이 들어오는 과제들에 힘들다는 생각도 금세 잊긴 했지만) 하지만 중간점검차 작업 물들을 보니 그런 고민은 싹 사라지고, 감사함만 남았다. 나와 결이 다르지만 단단하게 마무리한 작업물들에 크게 안심했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아니었구나, 내일은 대신해서 해줄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다행인 일이야. 진심으로 안도했다. 만약에 이 일들이 나밖에 못하는 것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여러 고마운 분들의 도움으로 절대 불가능했던 스케줄의 일들을 모두 해냈다. 그것도 굉장히 좋은 퀄리티로 해낼 수 있었다. 이건 정말 다행이다.


나는 이 일로 나만 해낼 수 있는 일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상 일이라는 건 내가 없으면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우기 마련이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만 굴러간다. 언젠가의 나에게 이런 사실이 꽤나 씁쓸했지만, 지금은 다행스럽게 느껴지고, 안도하게 된다. 나는 특별함을 버리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를 느낄 수 있었다. 혼자 해낼 수 있는 건 극히 일부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해내려면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나도 보통의 사람이고, 저기 킥보드를 타고 가는 할아버지도 보통의 사람이겠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할 만큼 해내는 나 같은 모두에게 다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N, 나는 특별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 근데 이게 훨씬 좋아."

"그래? 그거 좋은 일이야?"

"응. 좋은 일이야."

"좋은 일이네."

_친구 N과의 통화


아마 특별한 건 어렵고, 힘든 일일 테다. 희소성 있기에 가치 있는 '특별'은 나에게는 너무 외롭고 무겁다. 특별한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게 훨씬 좋은 일이다. 특별하지 않다는 걸 덤덤하게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세상에 편입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그 사람의 세상이 좀 더 궁금해졌다. 우리 모두는 특별하지 않고, 그래서 소중하구나. 이렇게 사는 거구나. 참 좋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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