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춘식 씨에게
2022년 9월 18일 새벽 1시 59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알았다.
이름은 정춘식. 대학교 출결에 필요한 검안서에는 9월 17일 밤 10시 50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도 학교에 제출했던 검안서를 열어보며 할아버지의 생일과 사망원인을 상기한다. 그러니까 그만큼 나와 할아버지는 낯선, 모르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올해 안에 쓰지 않으면 안 될 글을 지금에야 쓴다.
+정말 개인적인 가족이야기, 장례이야기가 있으므로 글 읽기 전에 주의해 주세요. 저를 제외한 누구에게 도움 되지 않을 글일 수 있습니다:)
그날은 이것저것 평소와 다른 날이었다. 학기 중에는 작업할게 아니라면 그 시간에는 침대 위에서 책을 읽고 있을 시간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기분이 이상했고, 침대의 따뜻함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책상이 있는 방에 앉아서 뒤라스의 '연인'을 읽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휴대폰은 정갈하게 책상 위에 놓여있었고 새벽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고 그렇게 부고 소식을 알게 됐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멍해졌다. 일차적으로 추석 때 힘없이 앉아있던 할아버지의 회색 옆모습이 떠올랐고, 그 사람이 나의 할아버지였지. 하는 자각이 두 번째였다. 세 번째는 그 사람이 죽었단 말이야? 하는 놀라움. 네 번째는 2주 전에 다녀온 친구의 외할머니 장례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례식에 가야 하면 내일 수업은 어쩌고 월요일 화요일 전공수업은 어떻게 하면 좋냐 싶은 생각만이 흘렀다. 그러니까 그만큼, 나에게 할아버지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나는 고3 수시반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고 내일은 학생들이 시험 전에 마지막으로 치는 시험날이었다. 정말 중요한 날이고 빠질 수는 없었다. 분명 학원에 말한다면 두말 않고 수업을 빼주고 조의금마저 줄 분들이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학원에는 두말 않고 제시간에 출근해서, 제시간에 마쳤다. 집에 들러서 군대에 간지 얼마 안 된 동생의 운동화를 챙겨서 장례식으로 향했다.
나는 아빠가 문자로 전달한 장례식이 2주 전에 갔던 친구 외할머니 장례식장과 같은 곳임을 확인하고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장례식장에 가는 길이 낯설지 않은 게 이상했다. 도착한 장례식장은 이전과는 다르게 화환이 입구에서부터 가득했고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입구에 비치된 화면에는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의 이름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몇 호실인지 모르지만, 이름을 확인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날 그 장례식장의 돌아가신 분들은 전부 정 씨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모른다.
친가에는 내 위로 언니가 두 명이 있는데, 큰언니 쪽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알게 됐다. 장례식장이 여기가 아니라는 걸. 문제가 있어서 중간에 장례식장을 변경했고, 나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이었다. 갑갑함에 화도 났지만, 장례식이니까. 그냥 택시에 올랐다. 차는 낯설디 낯선 길로 나를 옮겼고, 그곳에서 돌아가신 정 씨는 한 명이었다. 그때 처음 할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됐다.
나는 가족의 상을 치러본 건 처음이라서 모든 과정들이 낯설었는데, 검은색 상복을 입는 과정에서 흰 리본은 지팡이를 의미하고.. 어쩌고 저쩌고 예의와 규범으로 가득 찬 이야기들을 들었다. 사실 나로서는 그 모든 것들이 갑갑하고 어이가 없었다. 내가 할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가득 찼다면 그 규범이 안락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3일 상을 지내는 동안은 원칙적으로 식장 밖을 나가면 안 되고 손님이 오실 때마다 방에서 뛰쳐나와서 인사를 하고, 절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하며 음식을 나르는 일이 정말.. 정말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허례허식이랄까. 이게 우리나라의 장례? 이게 한국인의 전통? 물음표가 끊임없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뒤에 오래간만에 본 아빠는 몰라보게 늙어있었다. 애착가지 않는 그 사람과 어려운 가족들 사이에서 3일을 보내는 건 정말 끔찍했다. 엄마도 아빠도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다고 생각했는데, 엄마조차 없는 그곳은 지옥 같았다. 나는 의지가 없는 병풍이 되어 웃고, 고개를 숙이고 절을 했다. 의미도 알 수 없는 불경을 읽었고 악수를 했다. 그곳에서 3일을 보내면 확실하게 정신병이 걸릴 것 같았다.
나의 완강한 주장 끝에 아기들을 비롯한 청소년들은 집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 했다. 몇 어른들은 아이들을 택시에 태우는 나를 못마땅하게, 이상하게, 정신병 걸린 사람처럼 여겼지만, 원래 친가집에서의 내 위치는 그랬다. 어른들에게 대드는, 순종적이지 못한, 여자 같지 않은, 기가 센, 니 가제일 잘난 줄 알지? 그럴 거면 너 혼자서 살아. 너는 뭐가 그리 잘났니. 그런 말 하면 안 돼. 그런 생각하지 마. 나는 조용해진 식장안에서 어린 시절부터 내 주위를 맴돌던 어른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마 그 장례식의 구성원들이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 정도로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 나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 그들은 가족이라는 집단안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익숙한 듯 나를 찌르던 목소리들을 떠올리며 조용하게 시선만으로 찔리던 할아버지의 뒷모습으로 사고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예술가였어."
그러니까 할아버지, 김춘식 씨는 이른바 예술가였다. 명절에 가족이 다모이면 늘 어른들을 화를 내고 할아버지를 말렸다. 잔디로 덮여있던 마당을 콘크리트로 메우거나, 드릴로 알 수 없는 공사를 했다. 버려진 자전거 몇 대를 가져와서 바퀴가 잔뜩 달린 자전거를 만들어서 동네를 돌아다녔다. 가족들은 그런 것들을 정말 싫어했던 기억이 난다. 좋게 말해서 예술가지, 명절날 공사소음을 듣던 아이들과 어른들, 동네 주민들에게서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할아버지가 가족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꾀자, 공구를 든 할아버지는 늘 어디를 가는지는 모르겠으나 버스정류장이든 동네든 어디든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더니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발견된 장소마저도 도로 위였다. 어른들은 객사는 좋지 않다며 49제를 지낼 절을 알아보고 있을 때 나는 바퀴가 여럿 달린 자전거를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대체 어디를 그렇게 가고 싶었던 걸까.
올해 초 설날이었을까,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이혼하자며 가족들 앞에서 소리쳤다. 나는 할아버지의 그렇게 큰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모든 어른들은 아이들과 함께 방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고 나는 언니들과 아기들을 데리고 온돌방에 누웠다. 그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명절이나 제사마다 밥 먹고 앉아있는 게 다였는데.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큰소리를 냈다. 그것도 자기주장을 곁들여서. 나에게는 그게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처음으로 사람처럼 느껴졌다.
온돌에 몸을 녹이면서 큰언니에게 물었다.
"이혼하고 싶다는데, 이혼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할아버지는 할머니랑 살면서 아들넷에 딸하나, 며느리 넷, 손녀 손자 여덟 명이 있는 가정을 꾸렸다. 내가 어리긴 해도 그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안다. 이혼,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언니는 어른들은 다 늙어서 이혼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 싶은 거라고 했다.
나는 진심인가.. 싶었다. 나에게 할아버지는 그때 처음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다른 어른들은 더 활기 넘치는 그의 모습을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물며 나에겐 할아버지인 그가 그들에게는 아버지, 시아버지 아닌가? 나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이 그를 김춘식이 아니라 늙은 사람으로 치부하고 그 의지를 '그만하세요.'로 내동댕이 쳐버리는 것인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른들의 사정이 있을 것 같지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할아버지를 동정했다. 그즈음부터 할아버지는 몰라보게 허약해지고, 얇아지더니 추석에는 정말 회색인간 같았다. 얇고 얼굴이 노랗지만 이 가족구성원에서 진작부터 속하지 못한 사람처럼 존재감이 흐릿했다. 그를 본 건 단 한순간이었지만 그 옆모습이 너무 얇고 흐렸던 것만 선명하게 기억한다.
할아버지의 발인날, 그날까지도 슬프지 않았다. 그저 언니들이 슬퍼하니까 슬펐다. 온 가족들은 울었고, 나는 우는 언니를 안아줬다. 그 순간만을 위해 삼일을 버틴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어른들의 눈물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하얗고 무겁고 매끄러운 도자기에 담겨서 납골당이 있는 곳까지 옮겨졌다. 장남인 내 동생의 손에 안겨서 가족들이 만드는 일렬횡대는 검고 길었다.
납골당에 도착하고 나서야 자세히 보게 된 유골함은 딱 배스킨라빈스 31의 하프겔런 크기였다. 김춘식 씨는 그 통에 담겨 투명하게 빛나는 납골당 안에 자리 잡았다.
안치해주는 분은 이걸 닫으면 다시 열지 못한다며 위치나 각도를 잘 보라고 했다. 큰아빠가 대표로 유골함의 각도를 봤는데, 나는 장례식을 진행하는 과정 중에서 가장 큰 감정이 솟구쳤다. 할아버지는 늘 어딘가 가고 싶어 했는데, 납골당은 그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장례방식이 아닌가? 저 유골함을 깨버리고, 바다든 강이든 뼛가루를 던지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길로 49제를 지내는 절에 가서 몇십 번의 절의 하고 장례식 떡들을 챙겨서 집으로 돌아왔다.
내 이야기를 들을 친구 중 한 명은 내 가족들은 그들이 이해한 만큼 할아버지를 사랑한 게 아닐까?라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할아버지를 사랑하지는 않았으니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이 집안에서 내려오고 있는 '이상함'위치는 나에게 상속된 게 아닌가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하곤 한다.
누군가가 죽은 뒤에 하는 생각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내 삶에 스쳐 지나간 김춘식 씨는 기묘한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내가 자아를 갖고 난 뒤에는 멀쩡한 대화 한번 한적 없는 게 작은 아쉬움이다. 내가 말을 걸었다면 우리는 이 집에서 가장 좋은 이해자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위에서 써내려 온 글을 장례식을 하던 그날부터 오늘까지 쭉 해오던 생각을 쓴 것이다. 블로그든 어디든 남겨둬야 할 것 같은 이야기라 지금이라도 브런치에 글을 쓴다.
+지금 글을 쓰는 순간에 든 생각이 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이런 식의 글을 쓰는 것 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이해다. 이런 식의 이해도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