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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Feb 06. 2017

거리를 걷다


문을 열었다. 훅- 비 내음이 밀려왔다. 아직 거리에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이미 거리는 젖어 있었고, 비는 잠시 멈춘 듯했다. 잠시 망설이다 우산 없이 그냥 집을 나섰다. 대기는 이미 비를 머금어 무겁게 내려앉아있었다. 손을 내밀어 본다. 공기마다 습기가 스며들어 있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 해도, 겨울비는 이미 곳곳에 내려앉아있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멈춰 선 자동차에서 커다란 가방을 들고 사람들이 내렸다. 제법 크고 묵직한 가방을 드는 남자의 어깨에는 멀리서 불어온 바람이 묻혀 있었다. 몸을 숙인 남자 위로 웅숭그려 있는 바람. 그렇게 습기로 가라앉은 공기와 멀리에서부터 불어온 바람 곁을 지나 천천히 걸어갔다.


어쩌면 저들은 아주 멀리서 왔을지도 몰라, 이를테면 터키나 인도 같은. 아니면 아직 가보지 못한 룩셈부르크 같은. 혹은 가보고 싶었던 세비야, 피렌체, 마라케시, 페트라, 룩소르, 그라나다, 리스본 같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집트, 이탈리아, 요르단 등의 도시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낯선 골목과 골목, 오래된 사원, 타파스 바, 광장과 가로등, 빛나는 야경, 그리고 여행자들의 걸음.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지금은 설이 갓 지난 긴 연휴의 언저리. 그들의 발걸음이 대략 어디쯤을 향했을지, 현실은 너무 빨리 누추하다.  그러나 현실을 가장 닮은 추측은 잠시만 뒤로 밀어 넣는다. 너는 정말 몽상가야. 가까운 시일에 들었던 누군가의 말은 옳다, 가장 객관적이므로. 동시에 나는 가장 주관적인 객체이므로.


그렇게 걸어간다. 보도블록은 가만히 지나가는 이들의 걸음들을 지탱한다. 걸음이 지나간 자리마다 아프거나 밝거나 단절되어 있는 감정의 웅덩이들이 고인다. 이미 발꿈치들은 닳아 있다. 저마다의 인생을 버텨낸 것은 그렇게 모서리가 닳아있다.


거리는 물안개로 흐릿했다. 드문드문 켜진 간판의 불을 보며 지나쳐갔다. 이런 날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제법 간절하다. 한 잔의 온기에 기대 긴 저녁을 걸어갈 수 있는, 따뜻하지만 쓴 무언가가, 간절했다. 소식 한 장 없는 당신처럼, 이 도시는 한동안 적막했다. 어떤 가게는 텅 빈 채, 네온사인만 가늘게 켜져 있었다. 나를 잊지 마세요,라고 붉은 빛으로 타전되어 오는 신호를 뒤로 하고 나는 또 걸어간다. 나는 수신할 그 무엇도 없이 거리를 걷는다. 그리움의 전파가 툭툭, 그림자 뒤로, 빗방울이 되어, 떨어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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