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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Feb 07. 2017

세탁기


어느 날은 세탁기가 고장나버리지 않을까 기대한다. 저 네모나고 짙은 색의 세탁기는 사실상 너무나 오래 덜컹거렸다.


보이지 않도록, 타인의 시선 속에서 숨겨져야 했던, 목이 긴 양말도 매일 같이 품어야 했고, 세상살이에 부딪혀 팔꿈치에 듬성듬성 보풀이 일어난 허름한 제 경계선도 자주 속울음으로 삼켜야 했다. 새하얗게 표백되어 버린 슬픔도 두어 스푼 듬뿍 떠서 넣고, 사실은 뾰족한 가시 투성이 알코올도 제 속에다 넣다 보면, 외로움은 자주 한계선까지 차 버리곤 했다.


이거, 너무 고수위로 하지 마세요. 엔진이 바로 통 뒤에 있기 때문에 너무 가득 차서 돌아가게 되면 엔진 속으로 물이 들어가 쉽게 고장이 나버리거든요. 작년 여름 무뚝뚝한 A/S 기사의 손에 의해 플라스틱 외피를 걷고 허연 속을 드러낸 네게도, 그래, 외로움이란 치명타구나. 그래서 혼자 목울대로 넘겨야 하는, 식어버린 외로움 앞에서 자주 마음이 고장나버리는 거였구나. 사용설명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세상 앞에서 잠시 멈춰 선다.



그래도 가느다란 배관호스를 타고 맑은 물이 부어질 때면 까만 제 속도 조금은 씻겨져 내려가는 느낌이었을 거다. 슬픔이야, 서러움들이야 서로 뒤엉켜 몇 번 섞이고 제 속에서 한바탕 구르고 나면 어느 순간은 탁탁탁탁, 빠르게 탈수되어버리곤 했다.


오래 살아올수록 마음의 물기를 짜버릴 때에는 더 많이, 송두리째 제 생애를 흔들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등가교환의 법칙이라고 말해야겠다. 너무 많은 사랑을 주면, 마음도 깎여나가는 거라고.


또, 그래도 어느 맑은 날인가에는 깨끗해진 그리움들, 줄지어 나란히 걸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바람 좋은 날이면 햇살 내음 풍기며 조금은 더 향기를 품어내는 날이 오지 않을까.


오래된 세탁기의 꿈이 참 따뜻해지는, 당신으로부터의 연락을 기다리는 오후. 나는 또다시 당신에게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쓰고, 안녕, 명랑한 인사를 담아 내 삶의 기울기를 다시 세운다.


"반가워, 네 이름은 뭐니?"


그리움의 전파들이 투두둑, 다시금 모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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