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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Jan 31. 2017

비둘기호를 기억하다


언젠가, 갓 스물을 넘겼을 푸른 나이에 나는 부러 작고 오래된 기차역을 찾아가곤 했다. 그곳은 고택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이었다. 기차를 타기 위해 걸어가는 고운 오솔길 또한 내게는 작은 기쁨과도 같았다. 계절마다 피어나는 들꽃과 바람을 따라 온종일을 걷다 사진을 찍다 다시 걷는 하루를 목에 걸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지만 따뜻했다.


찾아오는 이 몇 없는 역사(驛舍)는 늘 한적하기만 했다. 빠르고 빛나는 새 기차일수록 그냥 지나쳐 버리는, 혹은 이곳으로 아예 스쳐 가지도 않는다는 작은 역. 한때 몹시 번창했었다는 이곳이 급격히 쇠락해버린 것처럼, 소멸 하여가는 것들 특유의 공기가 곳곳에 배어있었다. 차표를 끊고 지하도도 없는 일직선의 단순한 철길을 건너 간이의자가 놓인 플랫폼으로 들어서노라면, 온종일 철길 옆에 누워있었을 자갈이 사람의 발에 밟히고는 그제야 자그락자그락 소리를 내곤 했다.



이 구둔역은 작고 낡았으나, 또한 매우 아름다웠었다. 좀처럼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노을은 역사 안의 작은 은행나무와 작고 낡은 역사 위로 붉게 내리곤 하였다. 멀리서 기적이 울리고 덜컹덜컹 기차가 구둔역에 도착하기까지, 노을 속에서 빛나는 철길과 은행나무와 간이의자가 놓여있는 기차역의 아름다움에 나는 늘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그래서 부러 더 멀리서 빙- 돌아 걸어오곤 했던 스물 언저리, 그 시간들은 아직도 내 안에서 푸르게 출렁거리곤 한다.


역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 크든 작든, 번창함과 쇠잔함을 구별하지 않고 멈춰 서곤 했던 완행열차인 비둘기호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검게 그을린 촌부들의 주름에서 세월을 읽곤 했었다. 커다란 짐보따리를 들고 돌아오는 사람들은 처음 보는 내게도 서슴지 않고 삶은 감자를 권하며 팔다 남은 옥수수며 강냉이도 한 아름 안겨주곤 했다. 왁자하게 피어나는 웃음소리도,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정겨움도, 투박한 사투리에 뚝뚝 묻어나던 속 깊은 사람 내음은 아마도 이곳 비둘기호에만 있었으리라. 세련되고 현대적인 특급열차에는 없었을, 소박하고 사소한 것들은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어둑해져 가는 기차의 창가에 피곤한 이마를 기대고 서로 체온을 나눠 가지곤 하는 이들 위로, 어둠이 짙어 오면 창문 밖 사람들의 집들은 어둠 속에서 환하게 불을 켰다. 아마도 그들은 몰랐으리라, 자신들이 사는 집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인등(人燈)으로 단풍잎처럼 빛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어둠은 흐릿한 불빛 아래서 창밖을 응시하는 자의 모습을 정직하게 되비춰 주었다. 내 얼굴 위로 지나가는 어둠에 잠긴 들녘과 가로등을 보며, 착하게 눈을 뜨고 감는 버릇을 익혔다. "모든 차표에는 종착역이 누워있다."* 던가. 세상의 모든 길이 향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따뜻했고, 그렇게 비둘기호에서 나는 조금씩 인생을 배워갔다.


지금도 쉬이 잊히지 않는 노을과 기차는 이따금 내 몸속에서 스스로 길을 밝히곤 한다. 그렇게 그들은 내 안에서 푸른 존재의 집을 지었다. 곳곳에 멈춰진 간이역과 잃어버린 사랑의 종착역들이 쇄골이나 복숭아뼈 그 어디쯤에 한 움큼씩 고여 있다가는 추억들이 거세게 들이치는 새벽이 되면, 저마다 그리운 소리로 달그락거리곤 했다.




* 강은교, <차표 한 장> 중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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