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겠네.
- 1959년 2월 〈사상계〉 발표
이 시를 처음 접한 게 고등학교 때였는지, 혹은 스무 살 언저리였는지 쉬이 기억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시절, 어두운 운동장, 단풍잎처럼 촘촘히 박혀있던 교실들의 창문- 작은 별들처럼 어둠 속에서 빛나던- 그 네모난 공간 안에 갇혀 있을 수많은 청춘들을 삼키고 있었던, 그 불빛에 의지하여 홀로 운동장 벤치에 비스듬히 기대여 서서 시집들을 읽어나갔었다.
또한 스무 살, 헤어져야 했던 첫사랑 때문에 몹시도 아파하면서 읽어나갔던 기억도 있다. 억지로 돌아서야 했던 발걸음을 뒤로 박혀들던, 울음 속에 젖어든 그녀의 얼굴. 그리고 유난히 뜨거웠던 8월과 그날 해바라기들은, 그 뒤로 아무리 긴 시간들이 지나갔어도, 여전히 내게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열여덟과 스물. 그날들의 공통점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제목의 시를 읽었으며, 그 짧은 시를 읽으며, 잔잔하면서도 따스한 위로에, 나도 모르게, 깊은 곳에서부터 차고 오르던 슬픔이, 울컥,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목에 걸려 한참을 먹먹하게 만들던 구절들에, 오래 참고 있었던 마음들이 흘러내렸던 기억들이 있다. 어쩌면 그날 읽었던 시들은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몹시도 힘들었던 날들에 이 시를 읽었고, 그때마다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이 위안들이 주는 울림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기에, 나는 종종 열여덟, 혹은 스무 살의 가파른 마음을 기꺼이 위로하던 시를 ‘울음이 타는 가을 강’으로 기억한다.
어려운 말 하나 없이 평이하게 쓰인 시는, 홀로 서러움들을 삼켜야 했던 내게, 바로 곁에서 걸으면서 말을 건네는 친구의 목소리를 닮아 있어서 더 좋았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 이렇게나 어수선하고 을씨년스럽던 마음들에,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듣는다. 누구에게나 있는 그런 순간. 어린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 녀석이 속내를 드러내는 날, 둘이서 같이 오래도록 걷는 날, 그 날이 더욱 환하고 밝은 [가을 햇볕]이 드는 강가여서, [가을 햇볕을] [동무삼아 따라가]는 날이라서, 이 시 속의 풍경 속을 나도 따라 걷는 느낌이어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읽으며 그렇게도 쉽게 마음의 빗장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은. 당신에게도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 한 줌 듣던 그 날들, 덩달아 마음 아프고, 미처 말은 못했지만 내 아픈 사랑도 덩달아 같이 흔들리던 시간들이 없었던가.
이 시가 건드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성’이 가진 힘은 무척이나 강하다. 흔히들 헤어지고 난 다음날이면 세상의 모든 노래가 다 내 것 같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대중가요’의 힘을 이 시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커다란 수식(修飾)이나 난해하고 복잡한 상징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쉽고 명징한 언어로도, 이렇게, 툭, 마음을 건드린다.
그렇게 친구의 서러운 이야기, 내 섧은 마음들이 가을날 강가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고, 덩달아 [눈물]이 나기 마련이다. 시인은 그렇게 ‘눈물’ 나는 게 정말 당연하다고, 이런 슬픔들, 우리 모두에게, 다 깃들어 있는 거라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슬픔의 주식들은 공평한 거라고.
그러니 ‘괜찮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라고. ‘아픈 게 당연’한 거라고. 잊었던 감정들, 부러 감추었던 마음들, 드러내어도 된다고, 마음의 방파제를 넘어서는 이 슬픔들, 흘러내어도 괜찮다고, 시는 가만히 우리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래서 우리들이 토해내는, 슬픔들이 모여, 이렇게 [해질녘]에 저 강 위로 [울음이] 탄다. 여기에 시적인 운율을 실은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겠네.]라는 이 짧고 쉬운 문장이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구어체에 담긴 입말들이 좋다. 기쁘고 슬펐던 일들에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라는 사람 냄새나는 목소리를 이 시는 지니고 있다. 나는 이 목소리가 나타내는 느낌- 따뜻하고, 슬프고, 때때로 너보다도 나보다도 더 깊은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가을강의 모습에 놀라움을 드러내는, 혹은 장난기 많지만 속정 깊은 친구 녀석 같은, 바로 내 곁에서 같이 걸어가며 위로해주는 울림을 결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시는 종종 내게는 ‘목소리’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 시는 마냥 가벼운 시가 아니다. 왜 시인은 이 짧은 시 안에 굳이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을 이야기했을까. 간만에 들린 큰집, 제삿날. 제사 음식준비에 분주한 큰어머니며, 여전히 정정하신 큰아버지, 그리고 저녁 무렵의 분주함이 드러난 불빛이 강물에 비치는 일상적인 저녁 모습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 일상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으니.
혹은 유년기에서 벗어나 청년기에 보이는 모습들은 어린 시절에 바라보던 세상과 다를 수도 있다. 조금 더 허리가 굽은 큰아버지, 아버지의 꺼칠하고 힘줄이 돋아난 손등. 조금씩 낡아져 가는 담,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스무 살이 넘어버린 우리들. ‘어른’이라 규정짓던 나이 속으로 들어와 버린, 그러나 여전히 어딘가 미숙하고 불안한- 여전히 자라지 않는 아이가 웅크리고 있는 나이. 첨예하면서도 들뜬 것 같은 그 미묘한 시선의 차이를 어렴풋이 읽어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특히나 ‘상실’ 앞에서 더 즐겨 읽었다.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그렇게 내 상실들이 곧 사라지고 녹아나길 바랬다. 내게 있던 사랑이란 게 참으로 아팠으므로, 혹은 열여덟의 세상 역시 고단하고 고단했으므로, 나보다 더 큰 슬픔에 잠긴, [소리 죽은] 울음을 우는, 이토록 처연한 ‘울음 타는 가을 강’ 앞에서 녹아내리길 바랬었다. 그래서 나도 [이제는] [바다에 다와가는] [가을江]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래었다.
동시에 이제는 조금 더 다른 넓이를 가진 구절이 조금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어릴 적에는 ‘얼른’ 이 아픔이, 이 시간들이 지나쳐 가길 원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 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이 기나긴 시간들의 여정에 마음이 간다. 길고 길었던 시간이 지나, 마침내 ‘바다’로 다가가는 강물의 여정들. 후회도, 기쁨도, 혹은 안타까움으로 점철되었을 지난 시간들이 그를 소리 죽여 울게 한다. 그래서 흔히들 수능국어에서는 이렇게 풀이하곤 한다. ‘인생의 황혼기에 이른 화자가 제삿날을 맞아 큰집이 있는 고향을 찾아가다가 노을에 젖은 가을 강을 바라보며 인생에 대한 상념에 잠겨 있다.’ 라고. ‘가을’ 역시 소멸과 종말의 심상으로 사라지는 것들의 슬픔을 노래하기에 알맞은 배경이라고.
분명 옳은 해석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시를 그렇게 한정된 틀 속에 가두고 싶지 않다. 열여덟과 스물, 그리고 지금에 있어 내게 이 시는 각각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내 인생의 시야와 입장과 상황은 분명 달랐을 것이나, 이 시가 주는 것은 늘 ‘위안’이었다. 분명 그 시기마다 내 마음에 가장 크게 들어와 박혔던 구절들은 달랐다. 어떤 날은 ‘울음이 타는 강’이었고, 어떤 날은 ‘네보담도 내보담도’ 라던 입말이었고, 어떤 날은 ‘친구의 사랑이야기’였으며, 햇살이 내리 쬐이던 가을날이었으며, 이 아름다운 풍경을 ‘모든 것이 사라지는 소멸의 계절’로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깊어지는 것들, 달라지는 시야(視野), 그 폭넓음을 허용하고 싶다. 누군가엔 첫사랑을 잃고 위로해주는 시로도 읽혔다면, 이미 커다란 울림을 지닌 것이 아닌가. 나는 앞으로 또 한참을 지난 어느 날에 이 시를 또 읽고 싶다. 그때에 내게 와 닿는 울림을 미리 재단하고 싶진 않다.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작은 글씨로 촘촘하게 박혀있는 해석들로 시를 가두고 싶지 않다.
그러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시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