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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Apr 06. 2017

비망록

김경미


김경미의 <비망록>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치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지우지 않도록.


- 1983.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이 시를 투고했을 당시 시인의 나이 스물넷이었고,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화려하게 지상으로 나타났을 때 시인은 막 스물다섯이었다. 당시 혜성처럼 등장한 김경미 시인의 <비망록>은 아직까지도 그녀의 대표작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널리 사랑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4연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로 시작되는 4연은, 정말이지 무엇 하나 버릴 것 없이 그 자체로도 이미 하나의 완성된 시였다. 그녀가 낸 첫시집의 제목이 4연 중에 나오는 구절을 따서 지은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1989)였으니, 어쩌면 시인에게도 마지막 연은 남다를 수도 있었겠다.

그리고 이 시가 유명해진 데에는 어떤 유명한 여류소설가가 ‘어느 날 새해 아침 이 시를 신문에서 읽고 눈물이 나려고 했었다.’라며 자주 소개했던 까닭도 있었을지 모른다. 서로 모양새는 달라도 살아가는 모습들이 비슷하듯, 저마다 감정의 빛과 기억은 달랐을지라도 마음의 울림이 비슷했기에 그토록 많은 공감을 얻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젊은 시인의 섬세하고도 예리한 감수성과 시 속에 깊숙이 깔려있는 그녀의 절절하고도 담담한 마음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울렸던 까닭에, 많은 청춘들이 그 나이 즈음에 이 시에 기대곤 했을 것이다. 스물 넷, 다섯. 그것은 때로는 위안이었고, 쓸쓸함이었고, 놓쳐버린 사랑이었고, 그리움이었으므로.


내가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나이 역시 스물네다섯쯤이었다. 시가 나온 지는 한참이나 지난 후였지만, 스물넷, 스물다섯, 이라는 공통분모는 여전히 팽팽했다. 당시 나를 규정짓고 있었던 것은 <이미 나는 늙었다>라는 짧은 한 줄일 것이다. 이미 인생은 피로감으로 가득하다고 느꼈으며, 한동안 말없는 애늙은이처럼 다니기도 했다. 그 무렵 같이 어울려 다녔던 몇 안 되는 사람들도 나보다 한참 연배의 선배들이었으니, 나는 그렇게 네모난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을 스스로 유리시켜 놓곤 했었다.


그럴 즈음 우연히 읽게 된 시가 <비망록>이었다. 시를 읽고 김경미 시인에 대해 찾아보기 전에, 나는 분명 이 시를 썼을 무렵 시인의 나이가 스물네 살일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시인과 화자는 종종 다른 위치에 서기도 하지만, 시에서 느껴지는 감정과 표현들- 젊고 서투르고 미성숙함과 성숙하고자 하는 미묘함들이 뒤섞인, 날선 감정들은 그 나이가 아니고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감정이었기에, 나는 <비망록>을 썼을 시인 역시 분명 스물넷을 살고 있었으리라 확신했다.


비망록(備忘錄)- 잊지 않으려고 중요한 내용을 적어 두는 것, 혹은 그런 책자.

 

그녀는 스물넷의 무엇을 잊지 않으려고 적어두었던 것일까. 앞으로 살아갈 순간에는 또 무엇을 기록하고 적어둘 것인가. 그렇게 나는 한 젊은 여자의 스물넷 비망록을 읽다,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라던 마지막 연에 멈춰 서게 되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이중주의 나날들. 어쩌면 날마다 나를 가두는 ‘절벽’을 살았던 날들. 사실은 ‘절벽’ 위를 걷는 나날들. ‘강물 위를 걸어야 하는’ 모순되고 불합리한 날들. 이 날들을 훌쩍 뛰어넘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다시 문득 깨어나 스물일곱이면, 서른이면, 혹은 더한 나이이면, 차마 다 쓰지 못했던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그녀는 연이어 말한다.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정말 편지를 쓰듯이 가벼운 어투, 그러나 뒤이어지는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지우지 않도록.] 문장들,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다. 나도, [실낱]처럼,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는, 바람처럼, 살고 싶다는 고백을, 누구에게라도 하고 싶었다. 내가, 이토록, 새파란, ‘절벽’ 같은 절망 위를 건너갔다고.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이라고 평범하게 어느 무더운 여름날을 묘사하는 것으로 덤덤하게 시작하는 것 같던 이 시는 [깨어 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라는 짧은 문구에서 반전을 가져온다. 우리들 삶에 [신]은 늘 [거만한 술래]였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상처는 늘 우리 자신의 몫이었다.


늘 서성거렸으나, 항상 아무도 없었다. 혹은 누군가가 내게로 손을 내밀 듯 했으나, [끝내 아무 일도] 없었다. 조금 더 부딪히고, 조금 더 과감하게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선명하고 선홍빛의 [아이]를 낳을 수도 있었을 텐데, 끝끝내 그녀, 혹은 [산두목 같은 사내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


종종, 우리가 머물렀던 시간들은, 그 시간이 지나서야 의미를 알 수 있다. 마치 연애의 ‘끝’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어떤 사랑을 했는지, 혹은 정말 사랑이긴 했는지, 그 사람이 나를 사랑했었는지를 알 수 있듯이. 시간 역시 그때 그 시간- 아팠고 슬펐으며 기쁘고 다정했던, 무성한 거짓의 계절을 지나야 사랑의 무늬를 어렴풋이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이 끝나는 순간은 대체로 슬프다. 상대의 웃음 속에 숨겨진, 달콤한 말 속에 숨겨진, 서성거리며 기다리던 기다림 속에 숨겨진, 어화둥둥, 어여쁘던 내 사랑의 눈빛 속에 숨겨진, 끝끝내 고개 돌려 외면하고자 했던 ‘거짓’들이 드러나는 순간이므로. 그 동안 스스로 눈을 가렸던 장치를 걷어내었기에, 더는 ‘거짓’을 가릴 수가 없으므로. 혹은 지나가버린 이후에야, 진정으로 마음을 주었던 이를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인연은 곧잘 어긋나고, 마음과 마음은 잘 닿지 않는다. 


<내가 만약 신이라면, 청춘을 인생의 가장 끝에 두었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은 아마도 그렇게 탄생하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김경미 시인의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를 놓아둔다.

   

낯선 읍내를 찾아간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포플러나무가 떠밀고

시외버스가 부추기는 일이다

읍내 우체국 옆 철물점 싸리비와

고무호스를 사고 싶다

청춘의 그 방과 마당을 다시 청소하고 싶다

리어카 위 잔뜩 쌓인 붉은 생고기들

그 피가 옆집 화원의 장미꽃을 피운다고

청춘에 배웠던 관계들

언제나 들어오지 마시오 써 있던 풀밭들

늘 지나치던 보석상 주인은 두 다리가 없었다

머리 위 구름에서는 언제나 푸성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목부터 어깨까지 시계를 차도 시간이 가지 않던

시간이 오지 않던

하늘에 1년 내내 뜯어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은 건

좌절과 실패라는 것도 청춘의 짓이었다

구름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고개가 부러졌던 스물셋

설욕도 못한 스물여섯 살의 9월

새벽 기차에서 내리면 늘 바닷속이었던

하루에 소매치기를 세 번도 당했던

일주일 전 함께 갔던 교외 찻집에 각각

새로운 연인과 동행했던 것도

어색하게 인사하거나 외면했던 것도 언제나

청춘이 시킨 짓이었다

서른한 살에도 서른여섯 살에도

계속 청춘이라고 청춘이 계속 시키며

여기까지 오게 한 것도 다 청춘의 짓이다

어느덧 불 꺼진 낯선 읍내

밤의 양품점 앞에서

불 꺼진 진열장 속 어둠 속 마네킹을 구경하다가

검은 마네킹들에게 도리어 구경당하는 것도

낯선 읍내 심야 터미널 시외버스도

술 취해 옆 건물 계단에 앉아 우는 남학생도

떨어져 흔들리는 공중전화 수화기도

다 청춘이 불러낸 짓이다

그 수화기 떨어지며 내 청춘 끝났다 절규하던 목소리도

그 전화 아직 끊기지 않았다는 것도

지금이라도 얼른 받아보라고

지금도 시키는 것도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아직도 시킨다고 따라나서는 것도

아직도 청춘이 시키는 일이라고 믿는 청춘이

있다는 것도 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 계간 『시와 미학』 (2012,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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