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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Apr 14. 2017

김수영


김수영의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 5. 29>          





김수영감히 한 번도 짐작치 못했던 그의 생애에 대해.


김수영 시인은 윤동주 시인보다 4년 늦게 태어났다. 김수영 시인 역시 윤동주 시인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가 절정일 시기에 태어나, 일본 제국주의 지배 아래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윤동주와 김수영 시인은 모두 제법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문학을 사랑했고, 공부도 잘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윤동주 시인은 지금의 연세대학교 전신이기도 한 연희전문대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 영문학과를 다녔고, 김수영 시인도 학창시절부터 영시를 비롯해서 오스카 와일드의 원문을 외울 정도로 영어에 관심이 많았었다. 또한 김수영 시인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가는 귀국해서 연희전문대 영문학과 4학년에 편입 후 중퇴하기도 했다. 


다만 윤동주 시인이 광복되기 불과 반년 전에 안타깝게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던 것과는 달리, 김수영 시인은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징병을 피하기 위해 온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했었다. 그때가 광복 1년 전이었고,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는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일본으로부터의 강압적인 시선이나 검열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모국어로 마음껏 시를 창작하기 시작한다. 바로 생가가 있던 서울 도봉구에서였다. 그래서 도봉구에는 지금도 시인의 생가와 묘, 그리고 시인을 기리는 김수영문학관이 같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어떤 면에선 비슷한 궤도로 살았던 시인이었지만, 아마도 두 사람 사이엔 커다란 접점은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적어놓은 글이나 기록 역시 없다. 다만 비슷한 시기, 비슷한 시대상황에서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고, 누군가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산문을 쓰고 시를 썼다. 그들 중 누군가의 삶이 더 무겁고 가볍다는 경중은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다.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의 치열함 중 누가 더 치열하다고,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윤동주 시인이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섬세하고도 내면적인 성찰의 시인이었듯이, 김수영 시인 역시 양심이 살아있는 시어를 가진 시인이었다. 김수영 시인을 가리키는 키워드 역시 ‘양심’, ‘정직’, ‘자유’였다. 

물론 김수영 시인의 시가 처음부터 그러한 정신세계를 품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시가 끊임없이 변해갔기 때문이다. 20대에 연극을 배우고 조연출을 하던 그는 우여곡절 속에서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등단했고, 곧 박인환 등과 함께 공동 시집을 발표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일어난 한국 전쟁 때 그는 북한군에 의해 서울에서 강제로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간신히 탈출해서 집 근처로 왔다가 경찰에게 체포되어 전쟁 포로로 거제 수용소에 갇혔다. 이후 무사히 풀려나게 된 그는 영어 강사 등을 전전하다가 결국 별다른 직업 없이 양계를 하고 시와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어린 시절 유복했던 가세는 이미 기울어진지 오래였다. 그를 향한 주변의 기대 역시 허물어진지 오래되었으며, 그는 그렇게 오로지 “시인”으로만 살았다.



생사에 놓인 명제, 삶


그에게 있어 ‘생사’의 위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명제였을 것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생에 대한 위협을 받아왔던 것일까. 14세에 커다랗게 앓았던 병으로 학업까지 포기하기도 했던 사춘기 어린 소년시절로부터 전쟁과 전쟁 속에서 헤매던 청년기를 간신히 지나가 버린 그를 이루었던 분자는 ‘가난’과 ‘불안’이 대부분이지 않았을까.

4.19를 겪으며 시대에 대해 참여해야 된다는 예술가로서의 사명을 느끼게 된 것 역시, 그의 내면과 외면이 모두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즉 사회에서의 명예나 부, 혹은 평범한 행복이나 소유에 대한 집착이 없었기에, 소유욕이라는 개인적인 욕구의 텅 빈 자리에다 시대에 대한 사회의식을 놓았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화려하고 난해한 수식 대신 꾸밈없는 직선적인 언어로 자신을 끊임없이 폭로하고 분석해 왔던 것은 아닐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그의 속내를 가만히 짐작해본다.   


계속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아왔던 시인의 죽음은 허망했다. 저녁 모임을 끝내고 가볍게 집으로 돌아오던 길, 갑자기 인도를 덮친 버스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으나 그는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사고였다. 불시에 일어난 사고. 갑자기 밀어닥친 죽음. 삶은 그렇게 ‘갑자기’ 우리에게 죽음을 들이민다.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불의의 사고 앞에 쓰인 시, <>


그도 미처 짐작 못했을 그의 죽음 직전에 쓰인 시가 바로 <풀>이다. 몇몇 이견들은 있으나, 대부분은 그의 시를 민중에 대한 시라고 해석한다. 즉, ‘풀’과 ‘바람’의 대립으로 바라보며, ‘바람’으로 상징되는 사회억압에 대해, ‘풀’은 ‘바람’보다 더 빠르게 일어나는- 낮은 삶을 살아가는 민초(民草)를 상징한다는 해석이 주류를 이룬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 자. 지독한 절망에 가장 먼저 차가운 바닥에 등을 대고 눕는 자. 절망과 고통을 먼저 느꼈기에 더 먼저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게 되는, 그러나 결국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자. [날이 흐려], 상처가 깊어서 [발목까지] 아니 [발]에 짓밟혀 [발밑까지] 드러누워야 하지만, 그는 결국은 일어나는 자. 비록 오늘은 [날이 흐리고 풀뿌리]마저 드러눕지만, 결국은 일어날 것으로 믿는 자. 그게 바로 ‘풀’이다.


가장 흔하게 널려 있어 귀함을 얻지 못하는 풀, 겨울이면 내내 마르고 빛을 잃은, 쓸쓸하고 볼품 없는 그 무엇에 지나지 않지만, 매섭던 겨울이 지나, 봄이 돌아오면 어느 사이엔가 무성하게 돋아나기 시작한다. 들녘에서나 시멘트 사이의 아주 작은 틈에서도, 담장 밑이나 보도블록 사이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피어나는 초록의 깊고 짙은 물결. 그 물결이 세상을 뒤덮고 세상의 빛을 선명하게 바꾼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라던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의 마지막 연처럼, 그렇게 김수영 시인의 <풀>도 그가 남긴 마지막 시가 되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세상을 향한 초록의 불꽃이 되었다.


     

4월의 중순그를 그리워한다.


그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그는 부리부리한 눈과 움푹 파인 볼을 지닌 우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초기에는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하는 시를 썼으며, 4.19 혁명 이후로는 강렬한 현실 인식을 통해 저항 정신을 바탕으로 한 현실참여시를 줄기차게 써왔다. 그가 죽기까지 쓴 시와 시론은 무려 200여 편에 달한다. 그는 비속어나 구어체도 시 속에 끌어다 써왔으며, 그런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새로운 시의 세계를 열었다는 평을 받으며, 그의 죽음 앞에서 많은 이들이 슬퍼했다. 또한 민음사에서 제정한 김수영 문학상의 위상 역시 높다.


그가 이 4월에 더 그리워지는 것은, 파아랗게 돋아나는 풀과 같은 민초의 힘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시대의 요구가 더 절실해지는 때여서 그럴 것이다. 하나의 시대가 가고 또 하나의 시대가 곧 다가온다. 이 시대를 열어갈 이가, 몇몇의 지도자가 아니라, 불처럼 일어나, 초록으로 세상을 뒤덮고 호령하며 점령해나갈 풀들과도 같은 이들이길 바란다.



다시 시를 놓아둔다서로 어깨를 기대는 착한 시를.


이성부의 <벼> 역시 시에서 ‘민중’을 잘 표현한 시다. 다만 이성부 시인의 <벼>는 평상시 김수영 시인의 시보다는 조금 더 따뜻하고 넉넉하다. 이성부 시인은 <농무>의 신경림이나 “4월도 껍데기는 가라”라고 강한 어조로 노래한 신동엽 같은 강렬한 시인보다는 함민복 시인이나 <섬진강> 시인인 김용택 시인에 가깝다. 그러나 그의 시 역시 ‘민초’인 우리네 삶을 따뜻하게 껴안은 시이니 만큼, 이번은 그의 시로 마무리할까 한다.



이성부의 <벼>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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