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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Apr 23. 2017

가난한 사랑 노래

신경림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내가 시인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그의 등단작인 <갈대>를 통해서였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몰랐다.”라는 마지막 연을 좀처럼 잊을 수가 없었다. 이 아름답고 슬픈, 그러면서도 담담한 어조를 지닌 시는 오랫동안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 <농무>를 통해서 본 그의 시적 변화는 무척이나 놀라웠다. 민중시인 혹은 농민시인이라 불리게 된 불리던 그의 시적 변화가 <농무>에서 여실히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무>는 후대에 민중을 위한 ‘운동’과 ‘문학’이 만나 드디어 뛰어난 작품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농무>는 어느 새 ‘신경림’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 중 하나가 되어버릴 만큼 유명해진 시지만, 오래 전에 출간되었던 그의 첫시집에는 <농무> 외에도 뛰어난 작품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의 첫시집을 아주 오래전, 헌책방에서 마치 보물처럼 건져 올려서 읽었던 내게는, 삶의 근거지를 잃은 사람들의 걸쭉한 삶들이 이토록 생생하게 운율을 지닌 ‘시’로 표현된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갈 곳이 없어진 이들의 체념어린 슬픔과 고통, 분노가 그의 시집 곳곳에 표현되어 있었고, 삶의 밑바닥에서 같이 아픔을 앓는 이들의 삶들이 배여 있었다. 그의 시집 <농무> 그 자체가 이미 삶의 현장이고, 발자취였으며, 아픈 기록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따뜻한 시선을 지닌,

     

시인이다, 그는. 그의 시는 가볍지가 않다. 쉬운 말들로 쓰여 있으되, 그 안에 품고 있는 삶의 깊이는 남다르다. 우리네 삶들이 그의 시 안에는 차곡히 들어차 있다. 그래서 그의 시를 하나하나 읽어나가다 보면, 삶에서 배여 나오는 진한 감동이 있다.

  

시인이 50대가 된지 얼마지 않을 무렵이었다. 시인은 여전히 가난했고, 그의 집은 길음동 산동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시인은 근처에 단골술집을 자주 찾았는데, 하루는 단골술집 주인 딸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며 한 청년과 함께 왔다. 그 청년이 신경림 시인의 시를 무척 좋아한다고. 청년은 순박하지만 불의에 대해 바른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올곧은 젊은이였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만, 청년은 너무나 가난했고, 빈곤한 노동자였기에 그녀의 부모님께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조차 힘들어하고 있었다. 더구나 청년은 노동 운동에 뛰어들어 지명수배자로 쫓기는 처지여서 설령 결혼 승낙을 받는다 해도 두 사람은 축복을 받을 수도, 심지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런 어려움 때문이었을까, 두 연인은 수차례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거듭해왔었다.


시인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난관을 이기고 결혼을 하게 되면 주례는 물론이고 축시도 써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결혼을 하라고 여러 차례 부추기기도 했다. 결국 이들은 용기를 내어 결혼에 이른다. 여전히 청년이 수배 중이었기에 작은 개척교회의 어두컴컴한 반지하방에서 고작 열 명의 하객 앞에서 치룬 비밀결혼식이었다. 약속대로 시인은 이들을 위해 축사와 더불어 기쁜 마음으로 축시를 써서 선물한다. 그 시가 바로 1988년에 출간한 시집 <가난한 사랑 노래>의 맨 앞에 실려 있는 <너희 사랑>이다.

       

너희 사랑     

- 누이를 위하여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자잘한 낙서에서 너희 사랑은 싹텄다

흙바람 맵찬 골목과 불기 없는

자취방을 오가며 너희 사랑은 자랐다

가난이 싫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반병의 소주와 한 마리 노가리를 놓고

망설이고 헤어지기 여러 번이었지만

뉘우치고 다짐하기 또 여러 밤이었지만

망설임과 헤어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굳어졌다 새 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깊어졌다

돌팔매와 최루탄에 찬 마루바닥과

푸른 옷에 비틀대기도 했으나

소주집과 생맥주집을 오가며

다시 너희 사랑은 다져졌다

그리하여 이제 너희 사랑은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처럼 눈에 익은 너희 사랑은

단비가 되어 산동네를 적시는구나

훈풍이 되어 산동네를 누비는구나

골목길 오가며 싹튼 너희 사랑은

새 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깊어지고 다져진 너희 사랑은


‘누이를 위하여’ 라는 부제가 적혀있는 시. <가난한 사랑 노래>에 달린 부제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와 어떤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들의 사랑을 이미 응원하고 있는 중이다.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라는 부제의 <가난한 사랑 노래>는 시인이 이들의 결혼식에 다녀와서 쓴 시이다. 이들이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었을지, 특히 청년의 마음을 헤아리며 쓴 시다. 이들의 사랑이 단단한 결실을 맺은 사실에 커다란 기쁨을 느껴 ‘덤’으로 쓴 시라는데 <가난한 사랑 노래>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시인은 축시인 <너희 사랑>에 더 애착이 간다고 말한다. 결혼 후 청년은 결국 체포되어 감옥에 다녀와야 했지만, 끝끝내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들을 향해 쓴 시는 여전히 단단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덤’으로 여전히 이들 부부는 그때로부터 30여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서로를 아껴주며 아주 잘 살고 있단다.


어떤 참고서에서는 <가난한 사랑 노래>에 대해 ‘진실한 삶의 따뜻함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아름다움’이라고 주제를 밝히고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원작의 가치를 해치지 않는 범주다. 그러나 ‘설의법’과 ‘청각적 심상’, ‘촉각적 심상’, ‘시각적 심상’으로 낱낱이 해부해서 이 시의 해석을 외우고 있을 ‘문학시간’은 여전히 안타깝다. ‘청각적 심상’으로 ‘불안 심리’를 잘 나타내었다는 해석은 분명 옳은 말이나 이 시가 그저 ‘외움’의 한 대상이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조금만 더 사람들이, 시를 보고 읽고 느끼며 ‘자신의 삶’ 속으로 시를 가지고 가면 좋겠다.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라고 반복되는 이 아픈 구절이 주제를 강조하고, 시적 안정감을 부여하며, 동시에 시적 운율을 형성하며, 설의법으로 쓰였다는 것 외에도, 우리가 이 시가 주는 외침의 절절함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탱크와 기계 굴러가는 소리


아이러니하게도 원작은 ‘기계 굴러가는 소리’가 아니라 ‘육중한 탱크 굴러가는 소리’였다. 한 인터뷰에서 시인은 군부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탱크 소리’라고 썼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시대가 시대인지라 출판사에서 살짝 ‘기계 소리’로 바꾸어 출판했다고 한다. 시인은 웃으면서 인터뷰에서 덧붙였다. “당시에는 안타까웠지만, 지금 생각하니 참 잘 됐어. ‘탱크’라 그러면 지금 누가 그 시를 읽었겠냐.” 

‘탱크’라고 적혀져 있다면 시대고발적인 시로 읽힐 수 있었겠지만, 보편성에서는 조금 더 떨어졌을 게 뻔하다. ‘기계 굴러가는 소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보편성을 획득한다. 하루의 아침이 두려웠던 적이, ‘이건 사는 게 아니야.’라고 자신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되뇌었던 일들이,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운 것들을 속으로 밀어 넣어야만 하는, ‘포기’부터 가장 먼저 체득하는 것은 분명 옳지 않은 일이다.


        

너무 가난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기를


UMC라는 힙합그룹의 <가난한 사랑의 노래>라는 곡은 방송 금지곡이다. 화려하지도, 매끄럽지도 않는 이 곡이 금지곡이 된 것은 아마 너무나도 직설적인 가사 때문일 것이다. 이 노래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구절은 ‘너무 가난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기를’이다.

      

오빠가 생각해봐도 그런 것 이제 정말 지겨울 것 같아

여기서 일하면서 보니까 말이야

샴페인 안에 반지를 넣어준다거나

아니면 꽃을 만땅 채워놓고 차 트렁크를 열게 하거나

정말로 멋진 방법들이 많고 많던데

꽃을 그렇게 살려면 이달 방세는 포기야

차는 빌려 쓰면 되고 방은 빼줘야 되는데

같이 살고야 싶지만 먼저 고백을 멋지게 해야지

그치만 시간이 있을까 싶어

너는 하루에 열 시간

오빠는 하루에 열두 시간을 일하면서 지나가고

한 달에 이틀을 쉬는데

누워서 TV를 보던지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게 되더라

어쨌건 마음만은 제발 받아달라는

구질구질한 말들은 이제 하고 싶지도 않다

 

너무 가난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기를

너무 가난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기를

너무 가난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기를

너무 가난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기를

    

‘가난’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장 무거운 굴레다. 시가 쓰였던 1980년대 노동 운동가와 술집 주인의 딸의 조합은 조금은 특수한 상황이었겠지만, 오늘날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체감하는 것은 너무나 ‘보편적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3포, 5포, 그리고 이젠 7포 세대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그리고 꿈과 희망…. 가난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가난이 ‘보편적’인 것이 되어버린다면, 그래서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는 것조차 사치가 된다면, 그것은 분명 사회가 우리에게 던지는 또 하나의 ‘불의’다.



가장 가난의 내음과 가까웠던 시인

    

이라고 신경림 시인을 평하고 싶다. 가난은 평생 그에게 따라다녔다. 정규직을 가져보지 못한 시인은 젊은 날 광산으로, 댐 공사장으로, 행상하는 친구를 쫒아 장날을 떠돌기도 했다. 이후 영어 강사로 겨우겨우 지내곤 했다. 다행히도 그의 시와 평론들이 인정을 받아 나중에는 동국대 석좌교수가 되었으나, 이미 가난이란 흔적은 그의 몸속에 깊숙이 새겨진 뒤일 것이다. 2014년에 출간된 시집《사진관집 이층》의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이란 시에서, 이 시인이 ‘가난’이란 것을 얼마나 잘 체득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떠나온 지 마흔 해가 넘었어도/ 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 수돗물을 받으러 새벽 비탈길을 종종걸음치는/ 가난한 아내와 부엌도 따로 없는 사글셋방에 산다. (중략) 전기도 안  어와 흐린 촛불 밑에서/ 동네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옷가지에 단추를 다는/ 가난한 아내의 기침소리 속에 산다/ 도시락을 싸며 가난한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내가 불쌍해/ 오히려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과 더불어 산다.”


-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中


그는 여전히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위치에 선다. 그는 말한다. 우리 사회의 겉모습은 풍요롭지만 여전히 내부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하다고. 그래서 그는 “나무처럼 사람들 곁에서 즐거움과 위로를 주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오늘은 어둡고 내일은 막막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누군가가, 80세가 넘은, 자그마한 체구의 눈 맑은 시인의 “나무처럼 끊임없이 약한 이를 위해 시를 써내려간다”는 고백은, 그래도, 우리에게는 위로다. 누군가는 이렇게 우리를 위한 작은 노래를 부른다. 가난하다고, 모든 것을, 다 잃지도 잊지도 말자는,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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