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가 묻고 움베르토 에코가 답하다.

박상수 평론가의 우려에 대한 어느 개발자의 대답

by 나인테일드울프
『문학동네』2025년 가을호 표지

인공지능의 활용 분야가 날로 넓어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문학이 예외일 리가 없다. 시와 소설, 평론을 AI가 쓸 수 있을까? 답은 예스(Yes). 하지만 얼마나 잘 쓸까? 그것이 문학의 감동을 온전히 재현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장담은 아직 누구도 하기 어렵다.

문학인들에게 있어서도 이 질문은 피하기 어려웠던 것인지, 『문학동네』2025년 가을호에는 아주 중요한 문제 의식을 던지고 있다. 박상수 평론가의 「영원한 베타 테스트로서의 여름」이라는 글을 보자. 그의 우려는, "인공지능, 알고리즘, 플랫폼, 데이터 등에 과도한 주체성과 힘을 부여해 은연중에 기술결정론에" 빠져, "주체의 능동성과 저항 가능성에 대한 탐색은 뒤로 밀려나고 주체의 균열, 무의식, 역동성, 타자와의 상호작용을 가볍게 여기거나 간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또, "시간의 문제, 즉 존재와 사회의 '두터운 역사성'을 포착하지 못하고 작품 안에서 주체가 기능주의적으로 매우 납작하게 작동하는 현상"에 대한 우려도 표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이 문제의식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뿐만 아니라, 부족할지 몰라도 이에 대한 최선의 답을 이끌어 내보려 했던 것이 나의 책 『에코로 AI 읽기: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으로 읽는 AI 』이기 때문이다.


주체의 상실? 우리는 스스로 '왓슨'이 되기를 자처한다

(기술결정론에 대한 답)


박상수 평론가가 경계한 '인공지능에 과도한 주체성을 부여하는 기술결정론'은, 내 책 1부에서 다루었던 '셜록 홈스와 왓슨'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AI가 내놓는 번뜩이는 결과물에 감탄하며, 그것을 마치 스스로 사유하는 주체인 양 착각한다. 에코의 기호학으로 분석하면, AI는 방대한 텍스트(파롤)를 통계적으로 재조합해 '그럴듯한 추론'을 내놓는 셜록 홈스다. 문제는 우리가 그 앞에서 아무런 비판 없이 "오, 대단하군요!"라고 외치는 왓슨의 역할에 머무르려 한다는 점이다.

AI는 욕망도, 무의식도, 저항 의지도 없는 수동적인 '기호학 엔진'일 뿐이다. 이 엔진은 사용자가 '토픽(주제)'이라는 나침반을 던져주지 않으면 시동조차 걸지 못한다. 박 평론가의 우려대로 우리가 주체의 능동성을 잃어버리는 순간은, AI가 너무 똑똑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질문하는 저자'의 지위를 포기하고 '감탄하는 구경꾼'으로 전락할 때 찾아온다. AI에 주체성이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위험한 환각일지 모른다.

나의 책에서 누차 강조했듯, 'AI의 파롤''사용자의 파롤'이다. 기계는 말을 하는 주체가 아니라, 우리의 말을 되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납작해진 시간과 역사성 (시간의 문제에 대한 답)


또한, 박 평론가는 '존재와 사회의 '두터운 역사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현상을 우려했다. 이는 내 책 2부에서 다룬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전날의 섬』 속 주인공 '로베르토'의 처지와 정확히 연결되는 지점이다.

망망대해에 정박한 배에 갇힌 로베르토처럼, AI는 학습된 데이터라는 '고정된 과거' 속에 갇혀 있다. AI에 역사는 살아 움직이는 인과관계의 흐름이 아니라, 통계적으로 박제된 데이터의 파편들이다. 그렇기에 AI가 생성하는 텍스트 속 주체는 시간의 두께를 잃고 기능적으로만 작동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기술적인 결함 이전에, '기억 없이(Stateless)' 매 순간을 파편적으로 연산하는 기계의 존재론적 한계다.

따라서 AI가 쓴 소설이나 평론이 무언가 '납작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 안에 '삶의 시간'이 거세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개 속을 헤매며 고유한 체험을 쌓아가는 인간의 '서사적 기억' 없이, 오직 명료한 데이터의 연결만으로는 문학이 담아내는 그 '두터운 역사성'을 흉내 낼 수 없다.

이러한 한계는 에코의 또 다른 소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 사고로 기억을 잃은 주인공 '얌보'는 솔라라 저택의 방대한 서재를 뒤지며 세상의 모든 지식을 되살려내지만, 끝내 자신의 인생을 복원하는 데는 실패한다. 책, 잡지, 음반 등 '외부 데이터'는 넘쳐났지만, 정작 그것을 꿰어낼 고유한 '삽화 기억(Episodic Memory)'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AI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외부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참조하는 'RAG(검색 증강 생성)' 시스템이 직면한 딜레마와 정확히 이어지고 있다. 얌보가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나'를 찾지 못했듯, AI가 아무리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검색(Retrieval)한다 한들, 그 결과물은 화려하지만 공허한 '데이터의 콜라주'에 머물 수밖에 없다. '체험된 시간'이 결여된 복원은, 필연적으로 납작할 수밖에 없다.


권력관계와 불평등 우려에 대한 답


박상수 평론가의 두 번째 질문은 더욱 날카롭다. 그는 "다양한 행위 주체의 네트워크를 소통 가능한 언어로 '번역'해내는 행위 주체에게 어쩔 수 없이 '권력'이 집중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네트워크가 수평적일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그 안에는 '번역하는 자'의 권력이 숨어 있다는 지적이다.

내 책 『에코로 AI 읽기』는 이 질문에 대해 움베르토 에코가 그려낸 두 명의 '번역자', 즉 바우돌리노시모니니를 통해 답한다.

바우돌리노는 제국의 영광을 위해 '사제 요한의 왕국'이라는 거대한 허구를 창조해낸다. 그는 흩어진 전설과 소문을 모아(네트워크), 황제와 민중이 원하는 형태의 이야기로 번역해 냄으로써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반면 시모니니는 어떤가? 그는 19세기 유럽 사회에 만연해 있던 반유대주의라는 '시대의 편견'을 수집하여 , 『시온 의정서』라는 혐오의 텍스트로 번역해 낸다.

오늘날의 AI는 이 두 얼굴을 모두 가지고 있다. AI는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데이터를 '번역'하여 우리에게 내놓는다. 하지만 이 번역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책의 1부 '상징의 해석과 권위' 장에서 다루었듯, 모든 해석의 배후에는 그것을 정당화하는 '믿음의 체계(신학)'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AI가 학습한 데이터는 이미 우리 사회의 지배적 권위와 불평등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박 평론가의 우려대로, 권력은 이 데이터를 '소통 가능한 언어'로 번역해 내는 AI에, 그리고 그 AI를 설계하고 데이터를 주입하는 거대 기업에게 집중된다. AI가 '중립적인 척'하며 내놓는 답변 속에는, 바우돌리노처럼 특정 국가나 기업의 이익을 위한 서사가 숨어 있거나, 시모니니처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교묘하게 재조립되어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내 책은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윤리적인 이유 때문이라도, 절대로 AI를 신뢰해선 안 된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의심해야 한다.

AI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 배후에 숨겨진 데이터의 편향과 알고리즘의 권력 구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불평등과 권력의 문제를 지우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AI의 번역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 이면에 어떤 시모니니가 숨어 있는지, 어떤 바우돌리노가 속삭이고 있는지를 감시해야 한다. 이 '불신(不信)'이야말로 AI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윤리적 태도다.


그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

우리가 '축'이 되어야 하는 이유


우리는 AI가 주체를 삼키고, 역사를 납작하게 만들며, 권력을 독점할까 봐 두려워했다. 박상수 평론가의 우려처럼, 기술결정론의 그림자는 짙어 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우려 섞인 목소리가 담긴 바로 그 책(『문학동네』) 속에 이미 우리가 찾던 해답이 숨어 있었다.

소설가 단요는 「단요의 소설 읽기: 개구리 비가 내렸다고 증언하기」에서 이렇게 쓴다.


"개개의 자료는 고정된 실체이지만, 선별된 자료 간에 인과관계를 설정하고 강약을 부여함으로써 의미를 구성하는 작업은 연구자 개인의 몫이자 생동하는 과정입니다. 무엇을 축으로 삼을 것이냐 하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가령 갈릴레오 갈리레이는 중세 종교사에서 들러리에 불과하지만 과학사에서는 주연으로 올라섭니다!"


그렇다. 그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AI는 갈릴레오에 대한 수억 개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AI 스스로는 갈릴레오를 '종교사의 들러리'로 세울지, '과학사의 주연'으로 세울지 결정하지 못한다. "무엇을 축으로 삼을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질문하는 인간이다.

내 책 『에코로 AI 읽기』가 도달한 결론도 바로 이 지점이다. 에코의 기호학으로 본 AI는 무한한 데이터의 미궁(백과사전)이다. 이 미궁이 '혼돈'이 될지, 아니면 '의미 있는 길'이 될지는 우리가 어떤 '토픽(축)'을 설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AI 시대의 문학, 그리고 인간의 지성은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미를 구성하는 작업은 개인의 몫이자 생동하는 과정"임을 다시금 확인 받고 있는 것이다. 기계가 텍스트를 쏟아낼수록, 그 안에서 인과관계를 엮고 강약을 부여하여 '진짜 이야기'를 만드는 인간의 권능은 더욱 빛난다.

우리가 AI라는 거대한 기호학 엔진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기꺼이 '축'이 될 때, 비로소 갈릴레오는 주연이 되고, 납작했던 데이터는 입체적인 역사가 되며, 우리는 왓슨이 아닌 셜록 홈스가 되어 이 새로운 시대를 지휘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AI에 베타 테스트라는 표지를 결코 떼어서는 안된다.


[참고문헌]

박상수, 「영원한 베타 테스트로서의 여름」, 『문학동네』2025년 가을호.

단요, 「단요의 소설 읽기: 개구리 비가 내렸다고 증언하기」, 『문학동네』2025년 가을호.

강형모, 『에코로 AI 읽기』, 나인테일드울프, 2025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에코로 AI 읽기: 기호학으로 본 인공지능의 사유』

이 시대 문학의 고민, 같이 하고 싶습니다. 독자로서, 개발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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