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 없는 것: 텍스트를 넘어선 세계의 경험

#1 『장미의 이름』 속 등장인물들의 새로운 의미

by 나인테일드울프

금지된 책과 AI


해석이 멈추는 자리에서 AI가 만든 문장을 읽다 보면 묘한 이질감이 남는다. 완벽한 문장인데, 무언가 빠져 있다. 논리는 또렷하지만, 세계의 결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어긋남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함께 떠오른다. 작품의 중심에는 ‘미궁 장서관’이 있고, 그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텍스트와 세계를 대하는 인물 셋이 있다. 이 셋의 대비는 오늘의 AI가 빠지는 오류 구조를 그대로 비춘다.


텍스트를 대하는 세 가지 태도


1. 호르헤 — 텍스트를 절대적 질서로 다루는 자

호르헤는 텍스트를 하나의 방향으로만 흘러가게 만든다.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고, 모든 의미를 통제하려 한다. 그에게 책은 세계를 닫는 장치다. 이 태도는 AI가 ‘논리적으로 올바른 답’을 고집할 때와 닮았다. 정합성은 확보되지만, 그 외의 맥락은 차단된다.


2. 윌리엄 —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자

윌리엄은 텍스트를 분석하고 조립한다. 그는 논리의 줄을 놓치지 않고 사건 전체를 설명하려 든다. 그러나 그 논리는 어느 순간 인간의 의도나 세계의 실재를 따라가지 못한다. 생성 AI가 텍스트를 통해 세계를 파악하려다 결국 ‘의도·상황·분위기’ 앞에서 한계를 드러내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3. 아드소 — 경험과 삶의 맥락을 기록하는 자

아드소는 지적인 분석이나 억압적인 통제 이전에, 세계와 직접 부딪혀 얻은 경험, 감각, 삶의 맥락을 기록하는 화자다. 그는 AI에 결여된 '체험 없는 지능'의 대척점에 서 있으며, 텍스트와 세계 사이에서 해석의 한계가 위치하는 곳을 상징한다. AI는 논리적 재조합에 능하지만, 아드소처럼 텍스트가 태어난 세계의 공기, 분위기, 감각적 잔여를 끝내 포착하지 못한다. 텍스트를 넘어선 현실의 닻을 내리는 이 역할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금지된 책과 맹목성


작품에서 비극은 ‘금지된 책’에서 출발한다. 웃음을 다룬 책 한 권이 해석의 질서를 흔들기 때문이다. 호르헤는 텍스트가 열릴 가능성을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이 사건 전체를 뒤틀어 놓는다. AI 역시 텍스트만 보고 판단할 때 ‘그럴듯한데 틀린’ 결론을 낸다. 최근 Claude가 보여준 치명적 재조합 오류가 그 예다. 금지된 책을 통제하려는 호르헤의 태도가 AI가 만든 ‘어쩐지 이상하게 정렬된 세계’와 겹쳐 보이는 이유다.


텍스트와 세계 사이의 균열


에코가 보여준 세 인물의 대비는 AI가 갖지 못하는 능력과 AI가 지나치게 잘하는 능력을 동시에 드러낸다. AI는 윌리엄처럼 논리를 끝까지 조립하지만, 인간의 의도나 상황의 미세한 떨림을 잃는다. AI는 호르헤처럼 텍스트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금지된 웃음처럼 ‘세계의 다른 가능성’을 읽지 못한다. AI는 아드소가 감지하는 감각적 잔여를 포착하지 못한다. 텍스트가 발생한 세계의 공기, 분위기, 비말 같은 것들. AI가 지닌 강점과 한계는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모인다. AI는 텍스트의 사서를 흉내 낼뿐, 텍스트가 태어난 세계를 끝내 경험하지 못한다.


의미를 붙잡는 마지막 손길은 인간에게 남아 있다


AI가 언어를 아무리 잘 다룬다 해도 세계의 잔향은 텍스트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 잔향을 느끼는 존재는 여전히 인간이다. 윌리엄의 논리, 호르헤의 억압, 아드소의 경험. 이 세 조각이 함께 있을 때만 세계와 텍스트의 관계가 온전히 드러난다. AI는 그중 하나의 조각만을 갖고 있다. 나머지는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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