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디코딩 #001: 두 강대국을 위기에 빠뜨리는 전쟁 기계
『썸 오브 올 피어스(The sum of all fears, 2002)』는 톰 클랜시가 1991년에 발표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선 충격적이게도 미국의 영토 볼티모어에서 핵폭발이 일어난다. 사고가 아니다 테러다. 이 사건의 진상은 빠르게 밝혀지지 않고, 누가 공격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쌓여가던 불신이 양측의 적의를 확신하게 만든다. 양 강대국의 미사일 사일로는 열리고, 핵전폭기, 핵잠수함 모두 발사 명령을 기다리는 상황까지 치달을 때 영화의 긴장감은 극에 이른다. 이미 한 차례씩 재래식 공방을 주고받은 상황, 퇴로는 없어 보인다.
이 두 국가를 절멸의 전쟁으로 몰아넣는 이 기획 누가 한 것일까? 이 둘을 추동하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가? 들뢰즈의 전쟁 기계와 유목민의 관점으로 영화를 들춰보자.
[스포일러 주의 : 아래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관객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선사한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국가의 괴멸을 직감한 이스라엘은 최후의 수단으로 핵폭탄을 장착한 전투기를 출격시킨다. 그러나 이 거대한 폭력은 허망하게 격추당하고, 폭탄은 사막의 모래 구덩이 속으로 사라진다. 거센 모래바람이 흔적을 지우며 국가의 시야에서 이 가공할 무기가 '유실'되는 순간, 공포가 싹튼다.
질 들뢰즈에 따르면, '전쟁 기계(Machine de guerre)'는 본래 국가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라는 질서 이전에 존재했던 유목민적 에너지이며, 본질적으로 국가의 통제 바깥(외부성)에 머문다. 국가는 늘 이 위험천만한 외부의 힘을 포획하여 '군대'라는 이름의 제도 안으로 전유(Appropriation)하려 애쓸 뿐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국가의 폭력을 상징하는 핵폭탄이 유목의 상징인 사막 한가운데 처박혔다. 이는 단순히 무기를 잃어버린 사건이 아니다. 국가가 길들여 놓았던 폭력의 에너지가 다시금 그 기원으로 탈주하여, 진정한 의미의 '전쟁 기계'로 복원된 사건이다. 이제 이 폭탄은 국가의 논리가 아니라, 그것을 발견하는 자, 그것을 옮기는 자의 흐름을 따라 통제 불가능한 궤적을 그리기 시작한다.
미국과 러시아라는 초강대국은 말 그대로 전형적인 '국가 장치'다. 국가는 통제와 관리를 위해 세계를 구획하고 번호를 매긴다. 위도와 경도, 국경선, 법률, 그리고 핵무기 통제권이라는 촘촘한 격자가 지배하는 이곳을 들뢰즈는 '홈이 파인 공간(Striated Space)'이라 명명했다. 이 거대 국가들은 서로의 '홈'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다.
반면, 이 영화의 진정한 빌런 리처드 드레슬러는 이 격자 밖에서 움직인다. 오스트리아의 기업가인 그는 군대도, 영토도 없다. 그에게 세계는 국경이라는 홈이 지워진 '매끄러운 공간(Smooth Space)'일 뿐이다. 그는 국가의 눈을 피해 사막의 핵폭탄을 입수하고, 전쟁을 부추기고, 파시즘을 전파하려 한다.
드레슬러가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삼는 인터넷과 글로벌 통신망은 들뢰즈가 말한 매끄러운 공간의 현대적 현신이라 할 만하다. 국가는 여전히 영토와 국경이라는 물리적 홈을 관리하지만,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은 물리적 경계가 무화(無化)된 유목민적 활동 공간이다. 드레슬러는 이 디지털 공간을 타고 흐르는 정보의 속도를 이용하려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드레슬러의 전략이다. 그에게는 군대가 없다. 대신 두 강대국 사이의 홈에 균열을 내어 서로를 공격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는 전 세계 우익 정당, 민족주의 단체, 나치주의자 모두를 규합하여 이 일을 꾸민다. 국가의 경계를 의식하지 않고 세력을 모으는 방식, 세계 전체를 하나의 매끄러운 공간으로 점유하는 그의 세력은 지극히 유목적이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전쟁 기계의 본래 목적은 '전쟁'이 아니라 '매끄러운 공간의 점유와 이동'이다. 전쟁은 그 이동을 가로막는 국가 장치와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부차적 결과일 뿐이다. 드레슬러에게도 전쟁은 목적이 아니라, 기존의 '홈이 파인 세계(미-러 양강 체제)'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매끄러운 질서를 이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들뢰즈에게 파시즘은 단순히 강력한 독재 국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국가 장치의 통제를 벗어난 전쟁 기계가 오직 파괴와 부정만을 향해 폭주하는 상태를 뜻한다. 본래 전쟁 기계는 낡은 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삶의 공간을 찾는 탈주선을 그리지만, 이 선이 창조성을 잃고 증오와 결합할 때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죽음의 선(Line of Death)'으로 변질된다.
영화 속 드레슬러는 이 자살적 파시즘의 화신이다. 그는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여 군림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러의 거대 질서를 정면 충돌시켜 세계 전체를 거대한 무덤으로 만들려 한다. 국가가 스스로를 보존하고 관리하는 데 집착한다면, 드레슬러의 파시즘적 전쟁 기계는 순수한 소멸과 전 지구적 자살을 꿈꾼다. 탈주가 파괴로 치닫는 순간, 매끄러운 공간은 생명의 터전이 아닌 모든 것이 타버린 잿더미로 변모한다.
핵 공격이 예정된 순간 영화는 사건 직전에 풋볼 경기장의 국가(國歌) 제창 무대와 성조기를 비추며, 국가(國家) 그 자체로서의 목표를 아주 선명하게 표시한다. 볼티모어의 핵폭발은 단순한 테러를 넘어선다. 그것은 국가 장치의 심장부, 즉 '대통령'이라는 중심점을 직접 타격함으로써 국가의 위계질서를 단번에 무력화시키려는 시도이다. 들뢰즈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는 국가가 공들여 파놓은 홈의 중심에 거대한 구멍을 내고자 한 사건이다.
보이지 않는 외부의 적에 의해 국가는 공황에 빠지고,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국가 장치는 본능적으로 가장 익숙한 '적'인 러시아를 소환한다.
원래 전쟁 기계는 국가의 탄생을 막는 외부의 힘이었다. 국가는 이 위험한 에너지를 포획해 '군대'라는 공적 기구로 길들여 제 위치에 박아두었다. 그러나 볼티모어의 연기 속에서 이 포획된 에너지는 다시 야성을 드러낸다.
미국과 러시아가 핵잠수함을 기동하고 미사일 사일로를 개방하는 순간, 작동하는 것은 더 이상 냉철한 '국가적 이성'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 국가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려는 전쟁 기계 본연의 해체 에너지다. 국가가 전쟁 기계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결정적인 순간 주도권을 쥔 것은 목줄을 끊고 일어선 전쟁 기계 그 자체였다. 양국의 전쟁 기계는 서로 공명하며 전 지구적 해체(종말)를 향해 폭주하기 시작한다.
이 파국 앞에서 국가는 철저히 무능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격자 구조, 매뉴얼(DEFCON 단계, 보복 절차)에 매몰되어 있다. 'A가 발생했으니 B를 실행한다'라는 정해진 알고리즘에 따라 파멸의 단계를 밟아나갈 뿐이다. 반면 드레슬러는 이 경직된 매뉴얼 밖, 즉 매끄러운 공간에서 변수(조작된 정보, 허위 공격)를 던진다.
국가 장치는 스스로 판 홈에 갇혀, 그것을 따라 흐르는 죽음의 궤적을 멈추지 못한다. 시스템이 정교해질수록 그 시스템을 파괴하는 방식 또한 시스템의 논리 안에서 완성된다는 이 역설은, 국가라는 장치가 지닌 근본적인 경직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미-러의 대치 논리는 복잡하지 않다. 절명의 무기를 가진 상대방이 나를 공격하기 전에 그 수단을 없앤다. 철저하게 이 논리가 양측의 의사결정자들을 지배한다. 즉, 나의 이익이 최대화되는 방향으로 두 집단이 부딪히는 과정을, 영화는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하자만 게임 이론의 역설 그대로, 이 흐름은 두 집단의 최대 손실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보통 '죄수의 딜레마'에서 사람들은 두 죄수의 선택(배신이냐 침묵이냐)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주목해야 할 대상은 창살 밖의 수사관이다. 죄수들을 딜레마에 빠뜨려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자백을 받아내어 최대 이익을 챙기는 설계자.
드레슬러는 정확히 이 수사관의 위치를 점유한다. 그는 미-러 양국을 감옥에 가두고, 정보를 차단하여 서로가 최악의 수를 두도록 강요한다. 전쟁은 죄수들의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수사관의 성공이다.
전쟁은 게임 이론 당사자들의 실패의 흐름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아니 모든 전쟁이 그 실패의 결과로 발생한다. 그리고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전쟁 기계는 정확하게 수사관의 위치에서 작동한다.
잭 라이언은 CIA라는 국가 장치의 핵심 분자에 속해 있지만, 위기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매뉴얼 준수가 아닌 '탈주'이다. 이미 대통령과 참모들이 분노와 공포라는 국가적 관성에 함몰되어 죽음의 선을 긋고 있을 때, 라이언은 수직적인 보고 계통을 과감히 이탈한다. 이는 들뢰즈가 말한 '탈영토화'의 전형이다. 그는 국가가 정해놓은 경로를 거부하고, 스스로 진실을 실어 나르는 새로운 경로를 개척한다.
국가 장치는 서류와 직인, 공식 라인이라는 홈을 통해서만 소통한다. 하지만 라이언은 영화 초반 네메로프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 즉 서로를 한 국가의 수장이나 요원이 아닌 인간으로 대면했던 그 '정동(Affect)'의 기억을 복원한다.
이 개인적인 신뢰와 연결은 국경이라는 단단한 벽을 허물고, 두 국가 사이에 매끄러운 공간을 창조한다. 핫라인을 통해 전달된 라이언의 메시지는 국가의 공식 문건이 아니라, 시스템의 빈틈을 타고 흐르는 유목민의 격문과 같다.
그는 더 이상 죄수의 딜레마 속의 죄수가 아니다. 그는 감옥의 벽을 부수고 나가 수사관(드레슬러)의 얼굴을 직접 비추는 거울로 작동한다. 국가가 '전쟁 기계(군대)'를 가동해 상대를 멸망시키려 할 때, 라이언은 '전쟁을 막는 전쟁 기계'가 되어 그 기계적 관성을 멈춰 세운다.
결국 영화의 결말은 국가 장치의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에 포획되지 않은 한 개인의 사유가 어떻게 거대한 파국을 저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수적인 것의 승리'다.
국가는 전쟁 기계를 전유하여 핵이라는 절대 병기를 손에 넣었지만, 그 대가로 스스로가 전쟁 기계의 포로가 되었다. 핵은 투하되지 않더라도 그 존재만으로 전 지구를 감시와 통제의 격자(홈이 파인 공간) 속에 가둔다. 들뢰즈는 이를 '공포의 평화(Paix de la terreur)'라 불렀으며, 이 상태 자체가 이미 국가가 시민들을 향해 벌이는 소리 없는 전쟁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3차 대전이 미래에 올 것이라 믿지만, 들뢰즈의 관점에서 3차 대전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현재 진행형이다. 그것은 전면적인 핵폭발의 형태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보안 시스템, 정보 조작, 경제적 포섭이라는 '미시적이고 분자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 전반에 침투해 있다. 영화 속 볼티모어의 폭발은 이 잠잠하던 '상시적 전쟁'이 가시적인 '파괴적 전쟁'으로 임계점을 넘으려 했던 순간일 뿐이다.
영화는 잭 라이언의 활약으로 핵전쟁을 막으며 해피엔딩처럼 끝을 맺는다. 하지만 들뢰즈의 눈으로 본다면, 위기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다시 '평화라는 이름의 3차 대전' 상태로 되돌아간 것에 불과하다.
드레슬러가 꿈꾼 파시즘의 폭주는 멈췄을지언정, 국가 장치는 여전히 핵이라는 거대한 이빨을 드러낸 채 세계를 홈 파고 있다. 결국 이 글이 잭 라이언에게 주목한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시대에서, 시스템의 관성에 저항하며 끊임없이 생명의 탈주선을 그려내는 유목적 사유만이 파국을 늦출 유일한 브레이크이기 때문이다.
전쟁 기계라는 말은 그 뉘앙스 때문에 파괴적인 것으로만 오해를 살 여지가 많다. 하지만 국가가 그어 놓은 홈을 넘어서는 사랑, 우정, 신뢰 등도 모두 전쟁 기계다. 물론 분노와 혐오, 공포와 불신도 포함되어 있지만 말이다.
이 영화에서 결국 전쟁을 일으킨 건 국경 밖의 공포였고, 막은 건 네메로프와 라이언의 국경을 넘어선 신뢰였다. 국가도 전쟁 기계도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는 중재의 가능성, 공포의 총합을 낱낱이 뜯어보던 시선을 여기에 둔 채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