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계획은 삼 형제가 함께 할 여행이었으나 사는 게 바쁜 나머지 취소되기를 여러 번, 급하게 서두른 여행길이다. 더불어 인생시계의 속도가 빠른 친정엄마와의 추억을 더 쌓고 싶은 자식들의 마음이랄까.
일찍 서두른 탓에 뻥 뚫린 도로를 쌩쌩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오느라 구겨졌던 몸도 쭉쭉 펴고 짐정리를 대충 한 다음 멈춰진 배꼽시계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식당을 찾아 걸어가는 중이었다.
뒤에서 걷던 딸아이가 급하게 내 손을 잡는다.
" 엄마, 내 손 잡아, 이모네랑 같이 놀러 오니까 너무 좋다. 그지?"
" 응, 엄마도 너무 좋지, 맛있는 거 많이 먹자"
식구들이 잘 따라오는지 뒤를 돌아보자 찬바람은 1도 허용할 수 없다는 듯 꽁꽁 싼 친정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달팽이처럼 옷 안에 쏙 들어간 모습은 왜 그렇게 작게 보이는지 어릴 적 친정엄마의 모습과 비교하자니 세월의 흔적에 마음이 허전했다.
"햇님아, 햇님이는 아빠 손 잡고 걸어가"
"엄마 왜?"
"엄마는 할머니 손 잡고 걸어갈게"
흥, 치, 힝 딸아이의 앵두 같은 입술이 뾰족 튀어나왔다.
" 난 엄마 손 잡고 가고 싶은데 "
" 할머니 어두워서 넘어질 수 있잖아, 또 넘어져 다치시면 큰일 나"
" 치, 엄마는 맨날 할머니만 신경 쓰고 나는 신경 안 써주고, 엄마 나빠! 흥"
" 햇님이도 알잖아, 할머니 손 다치셔서 아무것도 못하는 거"
"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흥!"
뿡! 뿡! 더운 연기를 풍기며 딸아이가 앞서 나간다.
( 성격 급한 친정엄마는 건너편에 버스를 잡으려다 넘어지셨다. 오른쪽 새끼손가락뼈가 다 으스러져 수술을 하신 뒤였는데 그때의 몰골이란... 그래도 이 정도만 다치신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재활을 열심히 하시는 중이다. )
둘 부리에 혹여 넘어질까 친정엄마의 팔짱을 끼고서 어둑해진 길을 걸었다.
그새 사촌언니들 틈에 들어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딸아이를 보니 문득 저녁때마다 가끔 하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오늘은 엄마랑 나랑만 저녁 먹으면 안 돼?"
"엄마랑 단 둘이서만 먹고 싶은데"
" 또 할머니랑 밥 먹어? 싫은데"
그때마다 할머니의 사정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냐며 핀잔을 줬던 내 모습이 그려졌다. 초등학생이 된 녀석이 어른도 공경할 줄 모르냐, 우리가 도와야지, 누가 챙기냐고 말이다. 허나 한 발짝 뒤에 서서 생각해 보니 내 입장에서는 당연한 건데 너의 입장에서도 당연한 거라 믿었던 나의 오만이었다.배려라는 이름하에 너를 구속한 건 아닌지 배려라는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어보았다.
배려 (配慮) -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
배려는 이타적인 감정으로 남이 강요한다고 해서 생기는 마음이 아니다. 나의 마음이 스스로 움직여 한 배려는 큰 힘을 가지나 남이 강요해서 한 배려는 배려를 받는 사람도 불편하게 한다. 또한 배려를 하지 않는 사람은 나쁜사람으로 손가락질 받기 쉬운 게 현실이다.
예를 들어 임산부, 노약자 배려석에 아닌 사람이 자리에 앉기라도 하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은 피할 수 없다.
'여기는 내 자리야!' 하고 이름표가 적힌 마냥 큰소리치시는 어르신도 종종 볼 수 있다. 비록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더라도 노약자석의 자리는 권리인 듯 강요한다.
또 다른 예로 '아주라! 아주라!'가 있다. 야구장에서 공이 관중석으로 날아올 때 아이에게 공을 양보하라는 문화다. 아이에게 꿈을 주자는 의미로 시작됐으나 어린 순번대로 공의 주인은 정해진다. 하물며 어린 중학생이 잡은 공도 더 어린아이를 데려와 빼앗듯 가져가기도 한단다.
배려의 강요는 서로에게 불신과 상처를 입힌다.
나 또한 '할머니는 너를 키워준 분이잖아', '손이 불편하신데 네가 싫더라도 감당해야 할 일이야', '네가 불편해도 어쩔 수 없어'라고 단정지었다.
나와 아이의 마음은 본디 다른 것인데 왜 같다고 생각했던 걸까? 착한 딸 콤플렉스가 발동된 걸까?
살면서 남에게 배려를 강요했는지 반대로 강요를 받았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다. 하기 싫은데 주변 사람의 시선 때문에 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될까 봐 배려의 순수한 의미를 저버리진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배려의 기준은 개인적이며 어떤 기준으로 선을 그을 수 없다.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는 배려는 나와 남에게도 독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지 않게 하라'라는 말이 있다. 배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야 진정한 힘을 행사함을 알고 진심으로 서로를 위하는 배려있는 사회가 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