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콤말랑떡 Jan 05. 2025

싫어도 배려해야지?

배려에 대한 생각 나부랭이.

12월 31일.

2024년의 마지막날은 아이의 방학식이자 언니네와 가족 여행을 떠난 날이다.

애초 계획은 삼 형제가 함께 할 여행이었으나 사는 게 바쁜 나머지 취소되기를 여러 번, 급하게 서두른 여행길이다.  더불어 인생시계의 속도가 빠른 친정엄마와의 추억을 더 쌓고 싶은 자식들의 마음이랄까.


일찍 서두른 탓에 뻥 뚫린 도로를 쌩쌩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오느라 구겨졌던 몸도 쭉쭉 펴고 짐정리를 대충 한 다음 멈춰진 배꼽시계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식당을 찾아 걸어가는 중이었다.

뒤에서 걷던 딸아이가 급하게 내 손을 잡는다.

" 엄마, 내 손 잡아, 이모네랑 같이 놀러 오니까 너무 좋다. 그지?"

" 응, 엄마도 너무 좋지, 맛있는 거 많이 먹자"

식구들이 잘 따라오는지 뒤를 돌아보자 찬바람은 1도 허용할 수 없다는 듯 꽁꽁 싼 친정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달팽이처럼 옷 안에 쏙 들어간 모습은 왜 그렇게 작게 보이는지 어릴 적 친정엄마의 모습과 비교하자니 세월의 흔적에 마음이 허전했다.


"햇님아, 햇님이는 아빠 손 잡고 걸어가"

"엄마 왜?"

"엄마는 할머니 손 잡고 걸어갈게"

흥, 치, 힝 딸아이의 앵두 같은 입술이 뾰족 튀어나왔다.

" 난 엄마 손 잡고 가고 싶은데 "

" 할머니 어두워서 넘어질 수 있잖아, 또 넘어져 다치시면 큰일 나"

" 치, 엄마는 맨날 할머니만 신경 쓰고 나는 신경 안 써주고, 엄마 나빠! 흥"

" 햇님이도 알잖아, 할머니 손 다치셔서 아무것도 못하는 거"

"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흥!"

뿡! 뿡! 더운 연기를 풍기며 딸아이가 앞서 나간다.


( 성격 급한 친정엄마는 건너편에 버스를 잡으려다 넘어지셨다. 오른쪽 새끼손가락뼈가 다 으스러져 수술을 하신 뒤였는데 그때의 몰골이란... 그래도 이 정도만 다치신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재활을 열심히 하시는 중이다. )


둘 부리에 혹여 넘어질까 친정엄마의 팔짱을 끼고서 어둑해진 길을 걸었다.

그새 사촌언니들 틈에 들어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딸아이를 보니 문득 저녁때마다 가끔 하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오늘은 엄마랑 나랑만 저녁 먹으면 안 돼?"

"엄마랑 단 둘이서만 먹고 싶은데"

" 또 할머니랑 밥 먹어? 싫은데"

그때마다 할머니의 사정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냐며 핀잔을 줬던 내 모습이 그려졌다. 초등학생이 된 녀석이 어른도 공경할 줄 모르냐, 우리가 도와야지, 누가 챙기냐고 말이다. 허나 한 발짝 뒤에 서서 생각해 보니 내 입장에서는 당연한 건데 너의 입장에서도 당연한 거라 믿었던 나의 오만이었다. 배려라는 이름하에 너를 구속한 건 아닌지 배려라는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어보았다.

배려 (配慮) -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


배려는 이타적인 감정으로 남이 강요한다고 해서 생기는 마음이 아니다. 나의 마음이 스스로 움직여 한 배려는 큰 힘을 가지나 남이 강요해서 한 배려는 배려를 받는 사람도 불편하게 한다. 또한 배려를 하지 않는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기 쉬운 게 현실이다.

예를 들어 임산부, 노약자 배려석에 아닌 사람이 자리에 앉기라도 하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은 피할 수 없다.

 '여기는 내 자리야!' 하고 이름표가 적힌 마냥 큰소리치시는 어르신도 종종 볼 수 있다. 비록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더라도 노약자석의 자리는 권리인 듯 강요한다.

또 다른 예로 '아주라! 아주라!'가 있다. 야구장에서 공이 관중석으로 날아올 때 아이에게 공을 양보하라는 문화다. 아이에게 꿈을 주자는 의미로 시작됐으나 어린 순번대로 공의 주인은 정해진다. 하물며 어린 중학생이 잡은 공도 더 어린아이를 데려와 빼앗듯 가져가기도 한단다.


배려의  강요는 서로에게 불신과 상처를 입힌다.

나 또한 '할머니는 너를 키워준 분이잖아', '손이 불편하신데 네가 싫더라도 감당해야 할 일이야', '네가 불편해도 어쩔 수 없어'라고 단정지었다.

나와 아이의 마음은 본디 다른 것인데 왜 같다고 생각했던 걸까? 착한 딸 콤플렉스가 발동된 걸까?

살면서 남에게 배려를 강요했는지 반대로 강요를 받았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다. 하기 싫은데 주변 사람의 시선 때문에 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될까 봐 배려의 순수한 의미를 저버리진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배려의 기준은 개인적이며 어떤 기준으로 선을 그을 수 없다.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는 배려는 나와 남에게도 독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지 않게 하라'라는 말이 있다.  배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야 진정한 힘을 행사함을 알고 진심으로 서로를 위하는 배려있는 사회가 되길 희망한다.


빛나는 태양처럼 네 마음에도 빛나는 가치가 피어나길


딸에게도 사과를 해야겠다.

엄마의 생각을 너의 생각인양 강요해서 미안하다고.

배려라는 가치도 잘 모르는 너에게 '착한 딸'의 프레임을

 '착한 손녀'라는 이름으로 대물림 해서 미안하다고.

그 어떤 가치도 네 마음에서 나와야 빛나는 거야.

네 마음에서 나온 행동은 주변을 더욱 밝게 할꺼란다.

엄마도 착한 가면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는 가치가 피어나길 노력할게.

암튼, 사과의 의미로 오늘은 문방구 데이트 어때? Go! Go!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