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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니니 May 30. 2022

11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교회 가기.

 위니펙에 도착한 지 3일이 되었고 일요일을 앞두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한국에서 매주 일요일에 교회를 다녔다. 이곳 캐나다에서 교회를 갈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있었으나 역시 위니펙은 많은 한인들을 대변하듯 많은 한인 교회들이 있었다. 인터넷에는 많은 한인교회들이 있었는데 이중 몇 가지 우리의 기준으로 교회를 찾았다.

 첫 번째로 믿을 수 있는 교단이었으면 좋겠다는 것. 요즘에는 열린 교단도 많이 있으나 우리는 그래도 믿을 수 있는 교단으로 교회를 다니고 싶었다. 두 번째론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집에서 가까워야 됐다. 주말에는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가 오고 오후 4시엔 들어오는 막차이므로 이 전에 다녀올 수 있는 교회여야 됐다. 마지막으로 어느 정도 규모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내성적인 우리 부부가 교회를 다니고, 혹은 빠져도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찾은 한 한인교회는 믿을 수 있는 교단이었고,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목사님들도 믿을 수 있는 한국의 신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까운 거리였는데 그 거리가 무려 약 9.4km 정도였다... (물론 나중에 더 가까운 한인교회를 발견했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내가 9km를 걸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많이 걸어본 게 언제였지? 군대에서는 이보다 더 많이 걸었잖아... 바보야 그건 10년도 더 된 이야기라고!!'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차를 타고 가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지만 도착한 지 3일 된 곳에서 돈 없는 유학생 백수 부부에게 차가 있을 리 만무했다. 지도 앱을 켠 뒤 소요되는 시간을 봤는데 믿을 수 없었다. 자동차 9.4km 12분, 버스를 타면 40분, 자전거 타고 40분, 걸어가면 1시간 55분......롸? 자동차와, 자전거는 없으니까 선택지는 버스와 도보였는데 예배시간을 맞추기 위해선 버스보단 도보를 선택해야겠다. 우리에게 걷기 외엔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캐나다의 사람들은 부지런하게 운동을 즐기고 있었다.


 날이 밝았고, 결전의 날이 되었다. 11시 예배에 맞추기 위해서 9시에는 늦어도 출발을 해야 됐다. 7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일어나 씻고 준비를 하고 얼음물을 텀블러에 가득 담고 교회로 출발을 했다. 

'설마 2 시간이나 걸리겠어?'라는 마음을 안고 출발한 위니펙의 날씨는 너무 좋았다. 하늘은 높고 청명했고 간혹 불어오는 바람은 지면의 열기와 더위를 식혀주었다. 오전 9시 위니펙의 여름은 다소 더웠지만 걷기엔 무리가 없었다. 캐나다의 여름은 건조해서 그늘 속으로 숨으면 더위가 사라지곤 했다. 나그네에게 아주 좋은 날씨였다. 덥고 습한 한국의 여름은 이곳에 비하면 극한의 조건 같았다. 이른 아침부터 공원을 조깅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우리를 지나가면 인사를 해줬다. 낯선 외국인이 뛰어가면 눈을 맞추고 영어로 인사를 건네는 풍경은 나에게 너무 이국적인 모습이었으며 색다른 경험이었다. 한 남자가 뛰어와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Hi!"

 당황한 것도 잠시 우리 또한 웃으면 인사를 해줬다. 시작이 좋았다. 기분이 좋아 이곳저곳 사진을 찍으며 걸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우리가 걸어간 길은 '비숍 그랜드 트레일 웨이(Bishop Grandin Trail Way)'는 '비숍 그랜드 블리드(Bishop Grandin Blvd)라는 위니펙 남쪽에 고속도로 옆에 있는 산책의 느낌이었다. 차들은 우리의 존재도 모른 채 씽씽 달렸고 우리는 약 한 시간 정도 걸었다.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부터 좋지 않았던 발목(이 발목은 한국에 돌아와서 전거비 인대 파손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이 문제였다. 이날 따라 많이 걸어서 그런지 갈 길은 많이 남았는데 통증 때문에 걷는 게 쉽지 않았다. 아내도 괜찮고 잘 걷고있는데 왜 내 다리가 이럴까... 심지어 나는 에어있는 신발을 신었는데 말이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발목의 통증은 안정을 취하라고 소리 지르는 것 같았다. 가방에서 덜그럭 거리는 얼음물도 신경을 돋구웠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2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 우리는 교회에 도착하게 되었다. 

 나는 선글라스를 쓰고, 한쪽 어깨에 카메라를 메고,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교회에 들어갔다. 나의 모습은 누가 봐도 관광객 같은 모습이었고, 반면 단정하게 입은 아내는 똑바로 서서 교회로 들어갔다. 교회는 꽤나 큰 규모였다. 한글과 영어로 재잘거리며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와 지하에 있는 농구장이 매우 인상 깊었다. 예배당 앞으로 가자 처음 본 우리를 반기는 한 집사님이 오셨다. '나 집사님'이셨는데 이 분은 이 뒤로 우리가 교회를 오갈 때 언제나 도와주셨다. 이주자가 많은 위니펙에서 새 신자를 담당하고 계셨던 나 집사님은 단번에 우리가 새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우리의 집의 위치를 물어보셨다. 우리가 Water Bridge에서 걸어왔다는 것을 알고 나 집사님은 경악에 가깝게 깜짝 놀라셨다.

"거... 거기서 걸어오셨다고요??"

 깜짝 놀라며 우리가 대단하다고 말하는 집사님 앞에서 뭔가 영웅이 된 느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웅담을 털어놓으면 좋지 않은 발목을 보여주며 자랑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내가 나서서 자랑하지 않아도 이미 나 집사님은 교회에 보이는 사람들 마다 우리를 인사시키며 무려 워터 브릿지에서 걸어왔다고 자랑을 하고 계셨다.

"이 분들이 Water Bridge부터 걸어오셨어요!"

"그거 아세요!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인데 Water Bridge부터 걸어오셨어요! OMG!"

자랑하고 싶었던 내 마음은 어느덧 민망하게 되었다.

 '그... 그만!!'


예배가 끝나고 나 집사님께서 돌아갈 길이 막막한 우리에게 오셨다. 다가오는 모습이 한줄기의 빛과 같았다.

"오늘 집에 갈 때부터 매주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대신 조건은 매주 끝나고 식사하고 가세요."라고 말해주셨다. 해외에 나간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외국에서 제일 조심해야 될 사람으로 한국 사람을 꼽았다.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척 등쳐먹는 게 오히려 한국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위니펙에서 만난 한국 사람은 적어도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나 집사님은 중고차가 필요하면 도와준다고 하셨고, 실제로 매주 우리를 데리러 주일 아침마다 오고, 예배 후 데려다주셨다. 그 뒤로 우린 교회를 걸어갈 일이 없었다. 

위니펙 다운타운

 한국에서는 약 1킬로 떨어진 교회를 매주 차 타고 다녔다. 캐나다에서 설마 교회까지 2시간이나 걸리겠어?라는 의문은 실제로 2시간이 걸렸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투자였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두 시간을 걸어서 교회를 가라고 한다면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볼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사담 : 교회의 모든 사람이 나 집사님 같았던 것은 아니었다. 네이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정착도우미가 있었다. 이 사람은 돈을 받고 집과 인터넷 아이들의 학교 입학과 은행통장 개설 같은 업무를 함께 동행하며 도와주는 유료 서비스를 운영했다. 하지만 돈을 받고 서비스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위니펙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영어에 대한 공포가 처음오는 사람들이 이런 서비스를 찾게 만들었다. 이 사람의 경우 인터넷 설치라는 주 업무가 있었고, 정착 서비스는 부업으로 했는데 자신의 본업 때문에 정착 서비스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제 때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인터넷은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요금제에 대한 상의도 없이 본인이 설치하고 수수료도 챙겨갔다. 서비스의 질은 좋지 못했고 결국 뒷수습은 대부분 나 집사님이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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