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위한 생각보다는 남을 위한 생각이 더욱 숭고하고 좋은 것이라고 배운 사람. 첫째로 태어나 둘째를 돌봐야 되는 의무감을 태생부터 갖게 되었고 부모님이 없을 때는 가장이라는 짐을 짊어진 사람. 말하는 것보다는 침묵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감정은 숨기는 것이 어른이라고 배운 사람. 지금의 즐거움과 기쁨은 알 수 없는 미래의 즐거움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니 당장의 즐거운 감정들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보라고 배운 사람.
모름지기 큰 사람이라면 자신보다는 속해있는 공동체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배운 사람.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절대" 끼어들어선 안되며, 나의 의견을 내어서도 안되고 반대해서도 안된다고 배운 사람. 상상은 헛된 것이니 상상 따위는 하지 말고, 있지도 않을 일에 가정하지 말고 냉정하게 현실만을 받아들이라고 배운 사람.
그게 나다.
나는 그렇게 배운 대로 살았다. 부모님이 세팅해준 옳고 그름을 받아들여 살아왔다. 사람들에게 나의 감정을 보여주지 않았고, 적당한 수준의 관계를 맺어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말 좋은 친구같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람들에게 냉정하다고 혹은 이성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더 나아가서는 가식적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나 자신이 가식적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인정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의 즐거움 보단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 살아왔다. 타인의 눈빛만 봐도 감정과 원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고, 분위기를 읽는데 능통한 사람이 되어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됐다. 노력해 봐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 매일매일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다 보니 이제는 달리기 싫어졌다. 오늘이 허무해졌고 나에겐 의미 없는 하루하루의 연속이 되었다. 오늘의 나는 왜 사는 걸까? 나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 걸까? 남을 위해서는 얼굴도 보지 못한 존재들을 위해 매달 기부를 하지만 나를 위해선 옷 한 번도 잘 못 사는 사람이 되었다. 타인의 슬픔을 듣기 위해선 자정에도 나갈 수 있지만 나의 오늘의 무의미함, 공허함에는 도움을 요청할 곳이 하나 없었다. 모든 게 귀찮아졌다. 오늘 할 일은 내일 하면 된다. 그것도 귀찮으면 나중에 하면 됐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내일은 가치 없는 오늘이 될 테니 말이다.
쨍하고 해 뜰 날이 오지 않을수록 나의 삶은 무기력해갔지만 나의 이런 모습을 스스로 속이며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나를 속이며 살았다. 진실한 나를 외면하며 살았다. 그날이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며 스스로 죽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시간이 많아지자 이제야 나 자신이 보인다. 내가 보인다. 캐나다까지 날아와서야 겨우 내가 보인다. 나를 묶고 있던 속박, 노동의 굴레를 벗어나자 이제야 위로해줘야 될 내가 인지됐다. 정신없이 살아야 된다고 채찍질하고 스스로에게 학대받던 작은 나를 만나게 되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을 때 제일 우선이 됐어야 될 내가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이 생각을 위해서 내가 캐나다 까지 날아왔나 보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진정한 가치가 있다. 매일 놀아도 나의 존재의 이유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우선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됐다.
조금은 진부하지만,
"나 자신! 그동안 수고했다. 이제는 더 사랑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