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항상 도태된다.
요즘 한국에서도 식당과 카페 등에서 '키오스크(kiosk터치스크린 방식의 정보전달 시스템인 무인단말기)를 쉽게 볼 수 있다. 특히나 외국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에선 의사소통을 위한 피나는 노력보다 간편하게 터치 몇 번으로 주문을 완료할 수 있어서 편리함을 느낀다. 이런 장점도 있지만 노인과 취약계층들같이 키오스크에 노출빈도가 낮은 사람들이 키오스크를 사용할 수 없어서 오는 사회적 문제도 대두되고 있으며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캐나다에는 이런 키오스크가 많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영어를 할 수 있어야 된다는 자신감일까, 혹은 한국같이 IT가 발달되어 전국 어디서나 빵빵한 인터넷과 빠른 와이파이를 누릴 수 없어일까, 혹은 위니펙이 이런 것을 놓기엔 발전이 충분하지 않은 걸까. 키오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식당은 서버(종업원)가 있고 이들이 많은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손님들과 눈을 맞추고 그들과 간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시대의 흐름은 키오스크다. 특히나 패스트푸드 매장에선 거의 모든 주문이 키오스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와 별 반다를 게 없다.
다만 한국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 있다. 보통의 우리나라에서는 키오스크가 있으면 홀의 직원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있어도 최소한의 직원이 테이블 정리나 부족한 물품을 채우는 일들을 한다. 키오스크에 어떤 손님이 어떤 이유로 많은 시간을 사용하며 그곳에 있어도 크게 신경쓰지 않도 도우려 하지 않는다. 사업자들이 키오스크를 놓은 이유는 아무래도 인건비 절약을 위해 이 무식한 반응 속도를 가진 기계를 들인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마치 '키오스크가 있는데 홀 직원이 왜 필요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캐나다에는 키오스크 옆에 직원이 거의 항상 있다. 키오스크를 잘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도와준다. 그 사람이 없을 때는 가까운 직원들이 나타나 지켜보고 잘 못하면 도와준다. 키오스크보다는 사람이 중심이 되고 보호받는다는 기분이다.
기술 개발의 속도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몇 년 전 LG전자는 돌돌 말려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TV를 개발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삼성전자에서는 이미 접히는 디스플레이의 핸드폰이 나와있고 이것이 상용화 되었으며 이제는 기술력이 좋아서 단점이 개선되고있다. 외국의 한 기업은 해리포터에 나오는 투명망토 기술을 선보였다. 이제는 운전자도 없이 자동차가 운전을 해서 다니고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 전 에어컨이 스스로 켜지는 세상이다. 이런 빛의 속도의 발전은 누군가의 도태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내가 될 수 있다. 지금이야 젊기에 기술 발전을 따라가는 것에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나보다 더 어린 사람들의 대화방식, 신조어는 벌써 따라갈 수 없다. 이들이 만드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될지 감히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이들의 신조어로 움직이는 전자기기라면 나는 조작할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도태의 대부분 노인들이 담당한다. 오늘 맥도널드에 앉아 키오스크 앞에 먹먹히 서있는 캐나다 노인을 보게 되었다. 그는 평생 맥도널드를 오가며 사람들과 정겹게 인사를 나누고 주문을 한 후 맛있게 햄버거를 먹었을 것이다. 그의 앞으로 자신이 커다란 기계 앞에 서서 햄버거 하나도 주문할 수 없는 무기력함 따위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이었다면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캐나다다. 그 모습을 본 직원이 바로 나타났다. 천천히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노인의 주문을 도와줬다. 사람이 우선이 되는 나라, 경제적 이익보다는 다수의 사람의 행복을 쫓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나라, 이것이 선진국이 아닐까? 다수의 행복을 위해 사람들이 저마다 조금씩 양보하는 삶을 사는 것이 선진국 국민들의 품격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돈과 발전만 바라보고 빨리빨리 살아오진 않았을까? 도태되는 사람에겐 게으르다는 프레임을 씌우고 나의 이익을 위해선 누군가를 폄하하고 혐오를 조장하는 사회에 살고 있진 않을까?
한국에서 태어나 평생을 한국에서 보낸 한국의 노인들은 오늘도 아무의 도움이 없는 키오스크라는 기계 앞에서 좌절을 느끼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끄러운 시간을 보낸 뒤 누군가의 혀 차는 소리, 누군가의 짜증석인 탄식을 들은 후 아무런 소득 없이 민망함에 도망치듯 매장을 탈출해 빈 손으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다. 오늘 이곳에서 본 캐나다 노인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즐겁게 햄버거 밀(북미에선 세트[set]보단 밀[meal]을 더 많이 사용)을 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기술의 발전도 사람이 함께해야 품격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없는 기술의 발전은 누군가를 사지로 내몰고 사회와 격리시키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는 인건비를 아끼려고 키오스크를 설치하지 않았냐고 따져 물을 수 있다. 직원을 배치할 것이라면 키오스크를 왜 설치하냐고 따질 수 있다.
나도 따져 묻겠다. 죽을 거 왜 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