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쓰는 SNS에 영화<그녀>살짝 얹기
이번 '아무말대잔치'의 핵심 화두는 벤야민의 미학 이론과 살짝 연결된다.
이름하여 『랜선자아시대의 관계맺기』
디지털 모바일 시대가 인류에게 건넨 판도라의 상자가 있다. 바로 랜선-자아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자아ego에 대한 물음은 인류의 오랜 질문. 안 그래도 까다로운 질문인데, 이제 우리는 둘 이상 마킹해서 응답해야 한다.
당신이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꾸며낸 모습은 당신의 리얼-스페이스에서의 모습과 얼마다 맞닿아있나? 나는 가상과 현실과의 좋고 나쁨을 비교우위 하려는 게 아니다. 어색하거나 엇비슷하거나, 일치와 불일치 따위의 '잣대'로, 현실과 가상공간에 놓인 자기 자신에 관해 정확하게 톺아보려는 것.
자아 얘기에 앞서 얼치기 미학 지식을 잠깐 적어볼까. 공부한 거 복습하는 셈 치고.
20세기의 대표 똑똑맨, 발터 벤야민은 시스템 안에서 규격화된 제품과 제도를 소비하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작품은 '대체 불가능하며 유일무이한 가치Aura'(*이것을 벤야민은 아우라Aura라고 부르고 우리도 일상어로 잘 써먹고 있다지요)를 잃어버린다고 힘주어 말했다. 예술작품이 아우라를 잃어버린다면, 예술작품을 지지고 볶는 인간도 아우라를 잃어버린다. 아우라를 잃어버린 인간은 몰취향 하고 무개성 해지기 쉬울 것이요, 현대 예술의 도전과제는 바로 몰취향과 무개성의 수용&극복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헠헠 여기서부턴 더 이상 아는 척을 할 수가 없네.
여기까지 흥미를 느끼시는 분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같은 작은 소논문이나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같은 갓갓 입문서를 읽어보시라! (*제가 지금까지 지껄인데 오류가 있다면 이웃님들이 꼬옥 피드백을 해주시면 감사감사!)
아무튼. 디지털 모바일 시대에 이르러, 현대사회의 몰취향과 무개성을 무너뜨릴 새로운 도구가 만들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SNS, 쏘오시얄 네트워크 써어비스 되시겠다. 현실세계와는 다르게, SNS에서는 물리적 실감 없어도 자아가 형성된다. 한 개인이 현실 세계로부터 획득한 취향과 개성. 이 두 가지의 조합만으로도 SNS용 퍼스널리티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랜선-자아라고 해두자.
트위터의 익명 계정처럼 취향을 극한으로 몰고 가는 랜선-자아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흔히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했듯.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랜선-자아가 있을 것이다. 미학자들이 힘주어 주장하지 않더라도 가상과 현실이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다들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이제 SNS는 아무리 멀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네 삶과 분리할 수 없게 됐다.
영화 <그녀(2013)>. 영화는 가상세계의 OS와 사랑하는 현실세계의 인간을 그리고 있지만, 내 생각에 앞으로 가까운 미래에 현대인이 마주할 세상은 시어도어가 맞이할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가 끊임없이 던지는 메시지는 이렇다.
랜선-자아와 현실-자아가 빚어내는 불협화음을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나는 기왕이면 시어도어와 비슷한 시행착오를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있어 가상과 현실이 맞닿는 공간은 블로그다.
블로그란 대체로 폐쇄적인 SNS이지만, 오는 사람을 막는 공간은 아니다. 외진 골목의 오래된 맛집과 비슷하달까. 일상 기록과 자료수집을 겸하는 곳이다 보니 장래희망이 엇비슷한 사람들이 검색엔진을 통해 내 블로그에 흘러들어오고, 나도 이따금 그런 사람을 찾아다닌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 '내 바닥'에서 만날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블로그가 정보공유와 그룹스터디의 장이 된다.
또, 취향에 지知를 덧입히는 곳이다 보니, 비슷한 취향을 비슷한 수준으로 갖춘 사람들이 모여든다. 친목도모의 장이 되는데 어찌 보면 어설프게 하는 소개팅이나 인맥 소개보다 훨씬 좋다는 생각. 현실 친구들과의 '기모띠'한 만남에 질렸다면, 꽤 괜찮은 대안이 되리라.
한마디로 비판적으로 쓰고 적당한 원근감으로 대하면 SNS는 가능성이 풍부한 관계 맺기의 장이 된다. 휴학 후에 보낸 지난 2년은 그런 가능성을 있는 힘껏 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SNS와 랜선-자아를 반드시 메타 meta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
바꿔 말하자면 랜선-자아와 현실-자아의 표리부동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블로그 기자단 활동을 같은 시기에 보냈던 랜선 동료들과 이런저런 취재활동을 하며 나와 만나게 된 셀럽이 뜻밖에 큰 도움을 보탰다. 이들은 나와 물리적 실감을 공유하는 만남 이전에, 그들이 SNS상에 보여주는 콘텐츠가 앞선, 텍스트적인 만남이 먼저였던 사람들이다.
텍스트와 일치하거나 일치하지 않았던 당신들의 수십수백 개의 모습에서 얻은 결론은 랜선-자아는 어디까지나 허수아비라는 것이다.나 또한 마찬가지임을.
극단적으로 분류하자면, 랜선 자아는 현실 자아가 추구하는 이상향이거나 현실 모습의 정반대였다. (*관계설정의 톤&매너를 랜선-자아에서 끄집어내면 좋은 까닭이기도 하다. 한 개인의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담겨있다.)
내 생각에 SNS상의 메타-자아란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호크룩스와 비슷한 것이다. 총체적인 '나'를 따로 떼어서 콘셉트에 맞게 꾸며놓은 허수아비. 콘셉트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껍데기 아니던가.
그러므로
딱히 기대하지 않고
섣부른 판단은 유보한 채,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를 서로 발견해주는 일.
이 정도 톤&매너로 만나면 대체로 즐겁게 만나서 헤어지더라는 것이.
『랜선자아 시대의 관계 맺기』에 대한 나의 잠정 결론이다.
모든 인간은 혼자 살지 않고
한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하려면,
그와 같이 했던
누구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 영화 <동주> '이준익 감독' / MBC FM4U 이주연의 영화음악 中/ 2016.02.19 -
자아ego란 결국 정체성의, 문제고 '관계'라는 거름막을 거쳐 정확히 포착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 관심은 오직 '물리적 실감' 안에 있는 현실세계의 당신이다.
'랜선 자아'를 초월하는 것,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
나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망을 이루는 당신과 당신의 당신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