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필년 Jun 13. 2016

자취 X 메모 - 독립, 벽에 수놓은 숱한 꿈과 미래

-One Room Disco-

집에서 설거지하고 쉬는데 전화가 온다. 

직접 만나면 만났지 전화는 안하는 친구의 프로토콜.

뜻 밖의 전화는 의뭉스럽지만 대체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해 냉큼 받고 만다.  


"오 임상! 무슨일이야?" 

"밥샙아~ 나 자취방 나간다." 


이 놈이 조만간에 교환학생을 간다더니 어느새 갈 때가 된 모양이다. 

방 빼면서 물건을 정리하는 중인데, 언젠가 내가 슬쩍 자취방에 남기고 간 포스트잇을 봤다며... 

내 생각이나 불쑥 전화했다고 한다.




고교동창 윤이는 자취생이다. 경희대와 외대 사이에 절묘하게 놓인 원룸 한 칸의 주인이다. 

윤이네 자취방은 그의 고교동창이라면 이따금 들르는 명소다. 

기본적으로 주인이 호탕한 기질인데다 담소를 즐기는 성격이라 가면 항상 즐겁게 머무르게 된다.




윤이네 방은 꽤 깔끔했다. 


뭘 두고 자시고 할 공간도 없을 만치 좁은 탓도 있겠지만, 주방이나 화장실이나 침대는 늘 가지런 했다.


그렇다고 인테리어가 심심한 편은 아니었다. 창 틀에는 자취하며 사다마신 세계맥주병이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었다. 아! 윤이네 방은 밤에 몹시 멋졌다. 


블랙&화이트 블루투스 스피커는 작지만 묵직한 존재감을 풍겼고, 서재에 놓인 흰색 스탠드 등불은 인문학 책 몇 권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 윤이네 자취방을 좋아 할 수 밖에 없는 건 벽에 걸린 수많은 텍스트였다.


비록 삐뚤빼뚤 제멋대로 펄럭여도 자기 손으로 적어내린 문장에 둘러쌓이는 경험은 몇 번을 와도 신기한 체험이다.


어쩌면 나는 이 느낌이 좋아서 윤이네 자취방을 두 달에 한 번 꼴로 찾았는지 모르겠다.


이 곳은 단순히 먹고자는 공간이 아니라 한 인간의 치열한 사유부화장이다. 일종의 상상공작소 같았다.

윤이는 별자리를 새기는 사람이었다. 마음 가는 문장과 이따금 떠오른 사유로 별자리를 새겼다.


통학하기 더 할 나위 없는 위치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데다 자취 할 명분도 돈도 없는 내게 있어, 자취는 일종의 로망이다.



세금처리에 방값걱정에 음식고민에 혼자 사는 게 쉽지 않겠지만, 그는 어쨌든 집에서 나와 온전히 독립된 공간에서 독립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한창 통화하는 와중에 윤이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도 하고
친구들도 불러다 놀고 했던
여길 떠나려니
뭔가 뭉클하기도하고
아쉽네"


"그럴 수 밖에!
이 방이
너의 '두 번째 자궁'일지도"




윤이는 고등학교 동창중에 가장 성격이 많이 바뀐 친구다. 그 것도 아주 좋은 방향으로.


고등학교 때는 큰 접점이 없다가 대학교에 와서 친해진 게 그걸 반증한다.

우린 굉장히 이질적인 성격이었고 서식지도 달랐던, 평행세계에 사는 인류였다.  


그런데 이 친구가 독립을 하고 몇년이 지나더니 낯을 가리지 않고 타인과 부대끼기 시작했다.

몹시 적극적으로. 자취방을 이따금 찾은 나는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친구가 사람과 배움에 대한 진실한 갈망이 있다는 걸.

타는 목마름으로 내면과 세계에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걸.


그런 걸 온전히 '기록'해둔 공간인데 어쩌면 당연한게 아닐까.


그런 공간을 지배한 너를 무척 동경한다. 


부럽고 샘도 조금 난다...칫.




나 또한 윤이 만큼이나 공간욕심이 많은 사람인지라, 나름 독립하면 자취하고 싶은 곳을 맘 속에 정해둔 바가 있다.


효창공원근처/해방촌/서촌/북촌


하나같이 젠트리피케이션의 중심지이지만 

몇 년 뒤엔 어떻게 해서든지 단칸방 비집고 들어가 살어리랏다.


로망에 부합하는 나날이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윤이네 자취방처럼 아늑한 상상공작소. 누군가의 여인숙을 만들어주며 살어리랏다.


둥지를 트고 지낼 먼 훗날을 기다려본다.




통화를 마치니 몹시 섭섭하다.


밤에 걸으면 호그와트 같았던 경희대의 야경도, 질펀한 숙취를 잡아준 외대 학식도,불쑥 찾아가도 캔맥주 한세트만 내밀면 열려라 참깨! 였던 윤이네 자취방은 이제 추억으로 남고 마는가!

윤이는 전화를 끊자마자 내게 이 사진을 카톡으로 보냈다.




짜식...착한 허세 인정합니다.


그러니 나도 잽싸게 적어내린다.

방금 전 통화의 느낌이 가시기 전에, 사르트르 식으로


『주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기록하겠다는 열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2015.08.16-』

매거진의 이전글 동네 X 책방 - 나의‘안식처’, 나의 ‘무사지無事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