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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필년 Apr 28. 2017

동네 X 책방 - 나의‘안식처’, 나의 ‘무사지無事地.

무사지無事地. ‘나를 아무 탈 없이 편안하게 만드는 곳이 있다내게 20대 초반은 무사하기 어려웠던 시간이다사는 게 위태로워서 무사할 곳을 찾아야 하는 무시무시한 시절로 기억된다시간은 공간을 거치면 이내 잔잔해졌무사할 수 있는 곳으로 나아가면무시무시한 시간도 어느새 잠잠해진다는 걸나는 경험으로써 몸에 익혔다.

미아처럼 길 위를 떠돌던 때가 있었다마음 한 구석의 헛헛함을 지울 수 없었기에 마냥 헤매고 다녔다오래 묵은 실연 때문일 수도 있고 일상의 사소한 불만갑갑한 앞날이 염려된 까닭인지도 모른다사실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여하간 뒤엉켰을 따름이다.

친구들은 멀리 여행이라도 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부추겼지만주머니사정은 허름했다고로 나는 짧은 일탈을 사랑했다집이 인천이니천을 거점으로 둔 채 무리하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오래된 동네를 찾았다서울에 있는 오래된 동네도 좋았지만나는 정말이지 동인천東仁川 개항장 일대를 사랑했다. 해가 기울어 질 무렵부터오래된 건물이 들어찬 거리를 한참 서성이다 집으로 돌아갔다.


이 동네에는 어떤 가게가 주로 들어서는지.
원래 있던 건물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건물주와 세입자는 어떤 사이일지.
손님과 사장의 표정은 어떤지.
거리와 건물에는 어떤 사람들이 주로 들어찼는지.

거리 위에 놓인 모든 것의 사연story을 염려 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흘러갔다



거리에는 무엇보다도 깊게 생각하고 느낄’ 여백이 있었다여백은 그리움의 정서인지그리운 것을 한 가득 소환했다. 


하도 닳아서 버튼이 미끈미끈하게 들어가는 낡은 오락실머리는 끝판왕을 잊었는데 몸이 공략법을 기억한다나는 피어나는 추억에 전율한다높고 낮은 지붕이 제멋대로 섞인 골목길을 헤치니길 끝에 나타난 오래된 밥집에 들어가 허기를 가라앉힌다고등학교 때 본 모습여전한 맛을 간직한 쫄면과 돈가스가 사랑스럽다.



스무살 넘어서 누비는 동인천 개항장 일대는 내게 있어 신이었고, 오래된 골목에 들어선 가게는 신전伸展이었다. 추억을 머금은 공간을 더듬으면 곧잘 편안해졌고, 덕분에 이 곳에서 난 누구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는 이곳을 자유의 언덕이라 부르는데, 동네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자유공원을 고려하면 참 그럴듯한 작명이지 않나~ 속으로 홀로 빵~끗 웃으며 흐뭇해한다.



얼마 전, ‘자유의 언덕에 새로운 동네책방이 들어섰다책방이름은 동네 정상에 있는 무지개 굴다리의 이름을 딴 <홍예서림>. 자유공원 올라가는 언덕배기에 자리한 자그마한 동네 책방이다요즘 내게 있어 제일 가는 무사지無事地는 동네책방’ <홍예서림>이다.

독서를 하찮게 여기는 친구들은 종종 내게 핀잔을 준다책방 자체가 노잼 아니냐.”는 냉소동네책방 따위가 어째서 일등급 유희왕이냐 묻는다면 글쎄 … 나로서는 친구의 손을 찰싹 잡고 한바탕 동네책방 칭찬 을 보따리 채로 꺼내게 되고 만다.


여긴 인천이 아니라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인데, 부산들르면 항상 글벗서점에 들른다. 젊은 사장님의 탁월한 북-셀렉팅.

우선 동네책방은 적당히 시끄럽다

‘껴안아 주고픈 소란스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책은 과묵하고, 책 읽는 자의 입은 묵직하다. 펄럭펄럭 책 넘기는 소리와 배경음으로 깔리는 라디오 소리가 경쾌하게 흐른다. 나름 조화를 이룬 채 리듬을 만드는지라 묘하게 흥이 생긴다. 가게 안은 서너 명만 들어와도 움직이기 힘들만치 좁지만, 책방 안 대화를 옆에서 생생하게 듣게 된다.

"저기 계산요~"
"잠시만요~ 네. n원입니다!"
"A책은 없나요?"
"네. 나갔네요.허허"
"오늘도 좋은 책 들여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같은 대화를 듣노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시답잖은 대화지만 ‘오늘도’ 라는 말에 책방지기와 책방손님 사이의 신뢰를 느낄 수 있고, 나 또한 책방에 선뜻 호감이 간다.       

 

기억할 만한 동네책방 <책방무사>. 독립출판물도 취급했지만, 사장님이 절판본 셀렉팅에 아주 탁월한 감각이 있으셨다.

또 동네책방엔 그럭저럭 쓸만한 책을 구경할 수 있다

<동네책방>의 취급도서는 풍부하다고 말하기 어렵다라인업이 다양하지 않다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책을 원한다면 차라리 큰 길가 쪽의 대형서점인 대한서림을 가는 게 나을 게다.

하지만 '엉뚱함' '소소함'을 주제로 한 책. 그리고 '사람'을 다루는 책이 많다디자인이 엉성해도 내용이 알찬 책이 많다무엇보다 신선한 시각에서 쓰였다는 점이 좋다혹시 압니까? 책방 진열장 뒤에 영화 <인터스텔라>같은 공간이 있을지책장 뒤에서, 4차원 너머 책의 정령이 S.T.A.Y를 외치며 간절히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지.

책방지기의 취향과 책방손님의 취향이 일치한다는 것은 일종의 기적이다내 취향에 맞는 책으로 채우기 위해 책방지기는 부지런히 고민했으리나는 손님으로서부디 제 주인을 찾아가길 바랄 책방지기의 상냥한 마음씨를 포착한다책에 덮인 후후 먼지를 털어내며 정성스럽게 진열장에 늘어놨을 책방지기의 모습을 생각하면 괜히 뭉클해진다.



이 에세이를 시작한 건 <책방무사> 때문이었으나 매듭짓게 만든 건 <홍예서림>에서의 따끈따근한 모임.

무엇보다  동네책방’ 에는 모임이 열린다


얼마 전에는 아직 국내에 번역출간 되지도 않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의 첫 장을 함께 모여 읽는 ‘워크샵’이 열렸다. 호스트와 게스트는 저마다 가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포개놓았다. 바다 건너 있을 작가가 이 소식을 알면 크게 감동해서 동인천의 자그마한 책방을 찾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 짜인 모임이었다. 아마 <동인천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라면서 달려올지도.

'책'이라는 테마로 여러 사람이 모여 독서취향&독서체험을 공유하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우며 결코 쉽지 않다. 교양수준의 현격한 차이, 취향의 두드러진 갈라짐, 지적 허세, 낮은 호응 등등 여러 가지 까닭으로 쉽지 않다. 나는 학교 내&외에서의 모둠활동을 거쳐 독서모임의 까다로움을 알고 있다.

 그런데 <홍예서림>의 워크숍에서 나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앞서 밝힌 모든 결함을 상쇄하는 장점이 있다. '공간의 적합성', 책방에 다정한 싸장님의 '헌신적인 협조', 워크숍 주최자의 '성실한 준비'. 덕분에 나는 커다란 '용기'를 얻었다.

나고 자란 도시’의 ‘애착이 가득한 동네’, 지역공동체의 보기 드문 문화살롱에서, 오래도록 지속가능한 문화씨앗을 심는 일이 가능하겠다고. 비록 내 실력이 미약하더라도, 사랑하는 만큼 애쓰고, 아는 만큼 성실하게 준비한다면 <무라카미 하루키 읽기>’ 워크숍’ 처럼 근사한 모임을 꾸려나갈 수 있겠다고.           


          

“저도 하고 싶어요! 허락하신다면, 저도 모임을 기획할 수 있을까요?” 
“제가 꼭 이 책방이 오래 남을 수 있게 뭐라도 보태고 싶어요.”

이런 생각을 책방지기 ‘싸장님’에게 전하니, 내 생각을 흔쾌히 여기신다.  


해서 나는 요즈음 <홍예서림>에서 열 ‘모임’을 기획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좋아서 하는’ 일에 후회란 없기 마련이어서 나는 요즘 한창 신이 나있다. 요즘 들어 부쩍 동인천 한가운데를 누비며 요리조리 머리를 굴린다. 

동인천 개항장 일대를 다룬 문학작품을 추려내볼까
아니면 저번 모임에서 소설을 다뤘으니 이번에는 에세이를 다뤄볼까?” 


"내 충고는 아주 간단해요. 당신이 미도리라는 사람에게 강하게 이끌린다면,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거예요. 그 사랑이 순조롭게 잘 이루어질지 아니면 잘 이루어지지 않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에요. 사랑이란 원래가 그런 거니까. 사랑에 빠지면 거기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죠. 난 그렇게 생각해요. 그것도 성실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해요."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 양억관 번역 / '레이코의 편지' 中에서 -

불안하여 떠돌았던 거리 어딘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안식처가 그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애정을 쏟을 따름이다. 나는 이런 게 대학가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는 ‘인디indie-스피릿spirit’이라고 믿는다. 짧은 순간 사무친 느낌과, 느낌으로 어루만진 선택이 인연을 만드는 작업이야말로 젊음을 젊음답게 만든다고 믿는다. 


‘이런 정신’이 성실하게 길 위에 뿌리내리길 바라며, 나는 거꾸로 타인에게 말을 건내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무사지'는 대체 어디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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