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늘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고, 그렇기에 완벽히 자유롭다.
여행을 하게 되는 차고 많은 까닭이 있으나, 나는 여행의 본질로 '자유'를 꼽는다. 비일상에서 빚어지는 감각왜곡을 극한으로 몰고 간 끝에 획득한 물리적 실감. 그것이 내가 믿는 자유로움이다. 그것을 느끼고 싶다.
늘 그랬듯이 첫날 숙소를 정해두지 않았다. 마음이 내키면 저녁잠을 거르고 심야영화를 보러 갈지도, 자전거를 탈지도 모른다. 동쪽으로 갈지도 모른다. 여하튼 모르고 모르고 모른다.
내가 여행에서 걸어보는 건 언제나 이런 즉흥이다. 이것은 낭만이 아니다. 한 개인이 가진 기백을 낯선 공간에서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지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스포츠다.
이런 식으로 여행을 하다 보면 자유란 무엇인가. 어떤 방식으로 획득할 것인가. 어떻게 현실과 화해시킬 것인가.라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고 "자유란 결국 삶의 톤&매너를 좌우한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한 개인이 여행에서 추구하는 스타일은 한평생 공들이고 싶은 생활태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내가 여행에서 추구하는 것은 자유로움이며,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상황에 따라 잽싸게 몸과 마음을 맞추는 유연성 테스트에 가깝다.
자유를 획득하는 여행의 예시로 가장 적절한 게, 바로 이번 1박 3일 제주여행이겠다.
이번 여행의 자유를 바다수영에서 찾고자 했으나,
정작 자유는 악천후를 뚫고 나가는 물리적 실감에 깃들어 있었다.
여행자에게 호우주의보는 재앙이다. 야외활동에 제한이 걸리고 예측불가한 변수가 늘어난다. 낭만은 짧고 현실은 길다. 악천후는 몸을 쉬이 피로케 하고 결국 현실의 지리멸렬함만 증폭시킬 뿐이다. 바다수영에만 집착했으면 무척이나 낙심했을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겁을 먹었으리라.
하지만 이런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떠돌아야 하는 게 '나'야. 이것밖에 할 수 없는 걸. 자 그렇다면 생각을 멈추고 그저 앞으로. 앞으로.
계획 세우기를 중단하고,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것과의 피드백을 시도한다. 피드백의 이치는 다음과 같다.
지도보다 내 앞에 나타난 건물을 의지해 길을 더듬는다.
인터넷 검색보다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을 의지한다.
예전에 어렴풋이 들었던 풍문과 소문을 내 마음속 캐비닛에서 끄집어낸다.
선택 판단의 기준은 오로지 '직관'.
그러다 보면 결국 최선으로 나아가는 찰나의 선택. 그 선택이 쌓이고 포개진 끝에 여행이 끝나간다.
"우리는 하늘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고, 그렇기에 완벽히 자유롭다."
만화 <배가본드>에 나오는 말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검객 무사시는 타쿠앙 스님에게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며 대든다.
나도 그랬다. 이 장면이 연재된 시기는 내가 10대 말을 지나 20대 초반으로 달려가던 시절이었으므로, 딱 주인공만큼의 나이를 먹었었다. 나도 무사시처럼, 타쿠앙 스님의 슬로건을 땡중의 허세 가득한 궤변이라 여겼다. 사실 무슨 말인지도 잘 이해 못했다.
그런데 이제. 점점 타쿠앙의 깨달음이 어디서 왔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조금씩 선명하게 인식해나간다. "자유란 완벽하게 짜여진 변수 안에서 성실하게 선택하는데서 빚어지는 게 아닐까? "
이를테면 내가 제주도에서의 1박 3일라는 예측 가능한 시공간 안에서, 시시각각 통제 불가능한 악천후 덕분에 다이내믹한 사건사고를 겪었던 것처럼.
자유란 실천이다. 그렇다면 주어진 환경이나 물리적 상황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동이다. 그래서 악천후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를 활성화시킨다. 1부터 10까지의 선다형 문제의 보기가 20이나 (과장 좀 보태) 100으로 확장되는 거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따라 나의 행동의 많은 부분이 좌우될 것이다. 비가 내리면 젖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다닐 것인가? 버스를 탈 것인가? 지나가다 만난 사람에게 길을 물을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물을 것인가? 이렇게 여러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자전거를 구하려다 한밤 중에 만난 자율방범대원 아저씨의 자전거를 빌려탔고, 그렇게 빌린 자전거를 타고 신제주까지 자전거를 쭉쭉 밀고나갔다. 게스트하우스에 손님이 없어 혼자서라도 밤바다를 구경하러 나섰다. LED플래시에 의지한 채 등대로 향했지만, 중간에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밤중의 바다는 정말로 무서웠다. 나는 바다가 무서운 줄 몰랐던 도시풋내기였다.
악천후를 뚫고 나가는 여행은 아마 앞으로 제주도에서 절대 반복해서 겪지 않을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서 실시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성실하게 탐사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고난과 고통이 다 하나님의 예비하심 안에 있다는 기독교식 수사가 아니다. 여행이 성장의 밑거름이 될 거룩함을 강조하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다.
내가 기꺼워했던 건, 새로운 자유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치의 자유가 새롭게 주어졌음이 기뻤다. 주어진 상황을 일단 즐기고,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무언가를 최대한으로 체험하는 것.
어디 여행만 그럴까.
심장이 펌프질을 멈추는 날까지
"우리는 하늘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고, 그렇기에 완벽히 자유롭다."
라는 슬로건을 일상에 녹여내고 싶다. 저 선문답의 뜻을 보다 정확하게 헤아리고 싶다.
그런 여행이라면, 언제든지 기꺼이 나설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