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로에서

나는 그가 활활타는 횟불처럼 보였다.

by 정필년

간 밤에 상암에서 국가대표축구팀 경기를 구경하는데, 갑자기 세찬 소나기가 내렸다. 가을비가 찬 탓인지 몸이 노곤하다. 오전 아홉시, 아침밥을 먹고 약을 챙겨먹고 볕 아래 기대니 금방 낮잠에 빠져든다. 오후 두시에 눈을 떴다. 스마트폰 푸시알람을 확인하니 메일 한통이 와있었다. '세브란스병원 임상심리연구실'. 간단한 심리검사에 참여하면 보상이 짭짤해, 참가희망서를 넣어두었는데 연구대상범주에 속한다며 담당자는 내게 오늘 바로 올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런 일은 두어시간 동안, 그저 묻는 바에 성실히 대답하면 그만이다. 아르바이트하는 셈치고 넣어뒀는데 연락이 오다니. 나들이하는 기분으로 나갈 일이 생겼다. 나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 신촌으로 나섰다.


적어도 일년에 두어번 들르는 연세대학교. 학교 앞 경의선 철길을 지나 맞이한 풍경은 뜻밖에 낯설다. 우선은 '인파人波' 내가 기억하는 정규학기의 연세대학교는 '북적북적' 네 글자로 표현가능하다. 연대는 내가 가본 캠퍼스 중 가장 역동적인 분위기였다. 교양수업 중 교수님이 우리학교가 몇천명 단위로 움직인다면 연대는 만명단위로 움직인다는 말이 떠올랐다. 허나 이젠 학생을 반으로 뚝 잘라 송도로 옮겨놓은 탓인지 확실히 예전보다 적어보였다. 신촌이 쓸쓸하게 느껴지긴 또 처음이다.


그리고 '백양로'. 지난 몇년간 뚝딱뚝딱 먼지 풀풀 내며 은행나무 뽑고 땅을 파던 백양로의 리모델링이 끝난 모양이다. 입구에는 차가 들어가는 통로가 생겼고 아스팔트 도로엔 깔끔한 대리석이 깔려있었다. 그런데 내 기억 속의 백양로가 그리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예전에 있었던 나무는 어디로 옮겼는지 새로 들어선 나무는 왜소했고 곳곳에 새로 걸린 분수대 따위의 구조물은 어쩐지 어색해보였다.


백양로를 든든히 지키는 굵다란 나무를 헤치는 인파. 그 모습을 구경하는 건 나름대로 연세대 특유의 장관이요,

백양로 사이를 파고들면 신록의 녹음 아래, 각자 할 일을 부지런히 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있었다. 오른팔에 노오트 하나 끼워놓고 휘파람을 부는 기형도와 성석제가 있었다. 까까머리 중고등학교시절 어렴풋이 그리던 캠퍼스를 그대로 옮겨놓은 곳이 바로 연세대 백양로였건만, 내가 알던 백양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같이 백양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까닭은 계절이 바뀌는 문턱이 하필 가을이라, 시절이 모든 게 쓸쓸해보이는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탓이라 믿는다. 감상은 유보해야겠으나 앞으로 내가 사랑했던 백양로의 모습은

박물관 어딘가의 사진에나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임상검사는 식은죽 먹기로 끝내고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해낼 소일거리를 생각한다. 사람이 그리웠다. 드넓은 신촌에서 지금 당장 만날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한다. 이대 도서관에 있을 J와 연대 연구실에 있을 S선배를 떠올린다. 두 사람에게 연락을 넣으니 먼저 J에게 답장이 왔다. J는 애인과 밥을 먹는 중이라고 했다. 애인과의 만남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니 어쩔 수 없다. 그대 내내 행복하소서.


새로 지어진 백양로의 아케이드를 누빌 무렵, S선배에게 답장이 왔다. S선배는 마침 연구실에 있었고 우리는 학관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S선배는 C학교 출신으로 별 기대 없이 쓴 편입시험을 덜컥 붙어버려 연세대로 자리를 옮긴 역사학도다. 나는 S선배를 새내기 시절에 잠시 머무른 역사토론동아리에서 알게 된 사이다.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종종 만나 진하게 놀곤 했다. '가끔씩 오래 보고 싶은 사람' 이랄까.


그는 "그는 더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 싶었던 개천용, 동아리에 있으면 나머지를 오징어처럼 납작쭈글하게 만든 압착기. S선배는 반드시 대학원에 가야하며, 동아리에서 댓거리 하는 게 진심으로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역사에 대한 열정과 지식과 통찰력 모두 어마무지한 사람이었다. 나는 언젠가 S선배가 토론하는 모습을 보며 "와...진짜 인문대 대학원은 이런 사람이 가야하는 거지... 나는 그저 풋내기에 불과했군." 하고 속으로 읊조리기도 했다.


SNS를 통해 접하는 S선배의 글에는 하루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게 드러나는 성실한 독서가 묻어난다. 성실한 독서는 탁월한 통찰을 낳는 법. S선배가 하는 ASK.FM에는 다른 계정과는 다르게 사회전반에 대한 인식을 묻거나 인문학적인 화두로 무장한 진지한 질문으로 가득했고 대답도 2000자 이상으로(최소한 1000자는 넘는다.항상) 남기니. 묻는 사람이 세상만사에 대한 의구심을 논하려 달라 붙을 여지를 남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계정을 찾는다.


S선배는 독보적인 아우라를 지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 근간에는 S선배 특유의 언어사용습관이 있다.

문어체를 구어체로 소화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그리고 1920년대 명동극장에 있었을 변사를 떠올리게 하는 특유의 만연체가 있다. 댓거리 때의 모습으로 재현을 해보자면


"아~ 우선은! 조선전기의 세종시대를 바라본다면은...우선 두가지 시선을 큰 맥락으로 둘 수 있겠습니다→아↘"

"흐음...첫째는 어쩌구이니 어쩌구는 저쩌구가 됩니다→아↘" 그 기저에는 이런게 있고 그 뒤에 풀리는 것은 저런 게 있으니~ 이러쿵을 저러쿵함으로써~~~"


하는 식이다. <원인분석-나열-문제제기-비교/대조-결론>에 이르는...논문에서나 볼 법한 논리전개를 큰 덩어리 째로 내밷어 버린다. 중간에 탁 멈춰버리면 흔히 말하는 설명충처럼 느껴지건만,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돈된 논리를 순식간에 입으로 전개하니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경이로움이 지루함을 압도하는 것이다. 논문의 언어를 그대로 일상의 언어로 사용하는 건 S선배 뿐이거니와, 문어체를 맛깔나게 펼치는 S선배만이 할 수 있는 특수 능력이기도 하다.


S선배는 여전히 까치집머리였고 특유의 엉거주춤한 자세로 팔을 흔들며 내게 다가왔다.


"아이고오~오랜만이다 반갑다잉! 근데 벌써 나왔니? 너 군대갔던 거 아니여?"


S선배가 막학기에 논문쓰느라 시간이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 틀림없다.


"아이고 행님...지금 사실 제가 원래대로 였으면 백양로에 있을 때가 아니죠 허허허..."


우리는 끼니를 때우러 학관식당으로 들어갔다. 마주 앉아 공기밥을 퍼먹으며 나는 근 몇 주 동안 그랬듯, 집에서 빈둥거리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S선배는 내 말이 끝날 때마다 장탄식을 늘어놓고 특유의 만연체로 위로해주었다. 내 얘기를 다 마치면 상대의 근황을 묻는 것이 이치에 맞다.


"행님을 여기서 만난 게 아마 이년 전인데....ㅎㅎㅎ 이제 막학기 아니세요?


선배는 답한다.


"졸업에 필요한 학기는 우선 수업학기.그건 이미 마쳤고오...보통 심사학기에 수업듣는 학기를 끼워 맞추면 4학기에 졸업할 수 있지.나는 지금 수료하고 한학기 더 있다가 이번에 심사학기를 보내고 지금은 논문쓰러 매일 학교에 있어."


나는 손가락을 펼쳐 진지한 눈빛으로 대학원 졸업학기를 설명해주는 모습이 참으로 S선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요. 졸업논문은 어떤 주제로 쓰세요? 형 전공이 조선전기였죠?"


S선배가 손가락을 벌려 턱을 감싸쥐고 쓰다듬는다. 그가 몸 어딘가를 계속 만지작거리면 필시 무언가를 생각하려 애쓰는 것이다.


"맞아. 이번에는 '삼강행실도'를 가지고 쓰고 있어. 처음에는 정도전의 사상을 다룰까 싶었지만서두 사상적인 부분은 너무 커다란 듯해서 한 세대 뒤 쯤으로 건너뛰었지...윤리에 관해 다루는 논문이 될거야."


그가 숨 짧게 고르고 이어 말한다.


"그런데 이번 주말까지 교수님한테 가지고갈 초고의 초고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 다 완성을 못시켰어. 원래는 9월 초까지는 했어야 하는데..하하하...누군가의 글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평가하는 건 쉬운데 막상 직접 쓰려면 막막하잖아? 뭐랄까... 너도 글을 쓰니까...아! 이 표현이 적절하겠군! 너랑 나랑 '장르'가 다르지만, 무슨 느낌인지는 알거야. 하하하"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아요. 기사 쓰거나 어떤 포맷이 있는 글을 쓰면 진짜 그래요. 머리 속에 구상은 됐는데 정작 잘 끄집어내는 게 쉽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건 참 신기하게도 익숙해지면 괜찮아져. 뭐든 몸에 익히는...그렇지! 체화할 때까지가 어려운 것 같아. 논문쓰는 것도 사실 익숙한 분들은 적어도 육개월에 하나는 쓰신다고! 나도 석사과정은 그런 류의 작업을 몸에 익숙하게 할 때까지 계속 연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하나의 포맷을 체화하고 자유자재로 하게 되야 비로소 전문성을 얻게 되는 것이지."


우리는 무언가에 정통하여 일가견을 이루는 것이 꽤 성실해야하며, 다방면에 두루 능통한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식사를 얻어먹었으니 커피를 사드린다고 S선배를 꼬신다.사실은 대화를 조금 더 이어가고 싶은 탓이다. 일부러 교문 밖까지 걸어간다.


나는 앞으로 계획중인 진로에 대한 방향과 기획배경을 설명했고, 덧붙여 언젠가 작가가 된다면 대학문화를 토대로 무언가를 써내리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S선배는 내게 선배 나름대로의 조언을 제시했다. 커피마시면서 했던 대화는 기록하려면 한없이 길어지기 때문에 이만 줄여야 한다.



"널 보면 '항상 움직인다'는 점을 높이사고 있어. 이건 진짜야! 진심이야. 움직이면 뭐든 이루게 되어있거든...움직이는 것도 여러가지가 있지...몇가지를 조심하면 된다고 봐.


"그게 뭔데요?


"맴도는 거! 움직이는데 계속 빙빙 맴도는 거 있잖아. 그럼 곤란해지지...맴돌면 안 돼. 아아아! 또 있다. '하늘만 보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움직이는 사람. 이를테면 '개똥철학'류의 사람들...아흐! 이런 사람들은 엮이면 참 피곤해.하하하하! 아무튼 방향을 잡고 움직이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 어느 분야에서나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움직이는 사람은 뭘 하든 성공하는 것 같아."


"이년 전에 행님 만났을 때 생각 나세요? 그 때 했던 얘기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사실...그런데 방금 행님이 했던 말이란 비슷한 맥락이었던 거 같아요. 이따금 저한테 큰 영감을 주는 大현자가 몇분 계신데 그 중 한명이 바로 형님이에요. 이 말을 언젠가 형 만나면 꼭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우리는 악수로 대화를 매듭지었다. S선배는 다시 특유의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을 흔들더니 백양로의 불빛 사이로 들어갔다.


나는 그가 활활타는 횟불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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