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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필년 Nov 25. 2018

국문과 졸업논문과 인문학 연구자에 대하여

정체불명의 종이무더기에서 발견한 정보에 희열을 느껴

마음을 다해 썼다. 그러나 아쉽기도 했다. 그래서 깨달았다. 나는 연구자로서의 소질은 없는 사람이구나.


국어국문학과 학사졸업논문을 완성했다. 50%의 성실(하고 싶었던)한 논증과 30%의 애매한 분석, 20% 자의적인 문예비평이론해석과 10% 의 허술한 참고문헌배치에 따른 아무말이라 자평自評할 수 있는 작가론 연구다.

국문과 졸업논문 쓰는데 지난 1주일을 모두 갈아 넣었다. 시간 뿐만이 아니라 마음心, 에너지氣, 몸體 모두 쏟아부어야 했던 작업인 것이다. 허나 한편으로는 무진장 뿌듯하다. 내가 지난 대학생활에서 무엇을 배워 익혔으며,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해야할지에 대한 판단도 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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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는 공인시험 인증서제출이나 자체 시험으로 졸업요건을 설정해두지만 우리학교 국문과는 아주 심플한 과제 하나만 주어진다. 약 20p의 소논문을 작성하면 된다. 물론 한국어능력검증시험 1급을 따도 졸업요건을 만족시킬 수 있지만, 좀 클래식하게 졸업하고 싶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채집해보면, 심각한 결여가 있지 않은 이상, 학사졸업논문은 통과시켜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마음을 다해 쓰고 싶었다.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거 같아서. 그래야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을 거 같아서.

개강 후, 지도교수님을 찾아가 여쭤봤을 때, 나는 평론과 논문을 구분하지 못한 상태였다. 내 연구 주제에 대해 간단히 들으셨던 교수님은 평론으로 써보는 게 어떻겠냐 제안하셨는데, 논문 써보니 교수님이 말씀하신 바가 맞다. 연구용 논문보다는 평론으로서 더 적합한 주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평론이 그나마 자의적인 논리전개가 가능하다면, 논문은 그저 실증 실증 실증 해야하는 작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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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과학적인 글쓰기였다. 소위 말하는 뇌피셜은 절대 해서는 안되는 짓이고. 가설을 세워 선행연구와 이론적 근거에 뿌리를 두고 치밀하게 논증하는 작업이었다. 전적으로 훈련이 필요한 글쓰기였고, 자의적인 정의definition으로 하고 싶은 말을 짜는 나로서는 두세시간에 한페이지 쓰는 게 고작이었다. 

쓰다보니 참으로 논문을 쓰는 연구자들이 존경스러워지는 것이었다. 문이과를 막론하고, 그들은 세상에 흩어진 유리구슬조각을 한데 모아 그럴 듯한 형상形狀을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하는데 모든 걸 바치는 사람들이었다. 그 형상은 대체로 연구자들의 생물학적인 전성기를 훌쩍 지나서야 완성되는 것이었고 완성된 상이 반드시 쓸모있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 짝에 쓸모 없는 연구가 될수도 있으며, 연구자가 죽어서야 비로소 재평가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 없이 연구할 것이다. 정체불명의 종이무더기에서 발견한 정보에 희열을 느낄 것이요,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관계를 구체화 시키는 작업에 쾌감을 느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평생 헌신한 연구에 보답받았다 여기며 연구할 것이다. 그렇게 평생 호기심을 안고 연구하는 테마를 학문의 계보 안에서 완성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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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도해주신 분들에 대한 존경을 증폭시킨 계기도 됐다. 그들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됐다고 해야할까. 이번 논문 쓰는데 지도해주신 교수님들의 연구만 봐도, 하나의 연구는 결국 다음 연구의 후속작업을 위한 밑바탕이 된다. 90년대 운동권에 헌신한 경험과 비非수도권 농촌출신이란 연구자의 자전적 배경은 한국문학사의 탈근대적 욕망을 추적하는 동기가 됐고, 그것에 부합하는 작가에 대한 수십페이지의 논문 여럿과 책 한권 분량의 박사논문을 지어 제출하게 만들었다. 

교내 소설학회에 사람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아도 아랑곳 않고 마이웨이를 걸었던 모 선배는 석박사의 길을 뚜벅뚜벅 걸으며 지도교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인간이 왜 권력과 제도의 힘을 빌어 대량학살에 나서게 됐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렇게 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길은 없을지를 문학이란 테두리 안에서 지금도 열심히 탐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승님들의 논문을 참고하며 그들이 평생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할 테마를 구체적으로 느꼈다는 점에서, 수용과 비판의 기준점을 세울 수도 있게 됐다. 인문학에 정답은 없지만, 관점에 부합하는 해답은 분명 있으니까. 지도교수님이 못보시는 건 내가 잘볼 수도 있고 그것이 선배연구자로부터 후배연구자에게 바통터치를 이끄는, 학문의 계보를 작동시키는 이치라고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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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나는 그런 작업에 경애敬愛만 보탤 뿐, 모방은 차마 할 수 없음을 느낀다. 나는 인식론적으로는 직관적 판단에 강점이 있는 사람이라, 척 보면 아는 걸 굳이 논리적이며 실증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연구자로서의 삶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김금희라는 소설가에게 흥미를 느낀 건 우연히 소설가와 같은 시공간을 머금고 살았기 때문에, 저절로 알게 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직관적 판단으로 세울 수 있는 다양한 실용적 기획은 가능할 것이다. 말하지면 실증적인 연구를 추진하는 연구자의 삶과 직관적인 판단에 기댄 기획자의 삶은 지극히 다른 것이다.

하지만, 연구자는 기획자에게 참고할 수 있는 좋은 데이터를 제공하며, 기획자의 응용은 연구자에게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니 서로 상생하는 존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졸업논문을 쓰며 자주 생각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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