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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필년 Jan 27. 2019

악마의 작업

고독이나 절망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여간 악마의 작업을 통해서라도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은 나의 위치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역대의 모든 시인들이 한번씩은 해온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고독이나 절망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고독이나 절망이 용납되지 않는 생활이라도 그것이 오늘의 내가 처하고 있는 현실이라면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순수하고 남자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위도(緯度)에서 나는 나의 생활을 향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김수영 전집 2 - 산문』, <무제> 中 ,민음사, 이영준 엮음.

1.

글쓰기에 의심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나는 김수영의 일기장으로 돌아간다. 거기엔 '쓰는 사람'이 왜 이딴 쓸모없고 고단한 일에 힘쓰는지... 작문에 대해 고민했던 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지 오웰은 글쓰기를 악마와의 거래에 빗댔는데, 김수영도 마침 글쓰기를 악마에 빗댔다. (읽은 책을 또 읽으면, 이런 기분 좋은 우연을 짝지으며 쾌감을 누린다.) 

자식을 길러보지 않고서야 어린아이 귀한 줄 모른다는 것을 요즈음에 와서 나는 절실히 느끼게 되는데, 동시에 자기의 자식을 알려면 자기 자식만 보고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자기의 골육이나 자기 자식이 사랑스럽고 귀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동물적인 본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나에게는 자기의 골육붙이나 가정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기 싫은 것은 없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남의 아이들이 놀고 있는 광경을 보고 비로소 나의 자식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마음은 곧 아직도 내 자신이 동물적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징조이기도 한 것이다. 정말 남의 자식을 보듯이 내 자식을 볼 수 있다면 나의 생활은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가볍고 자유로운 것이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러한 관계는 유독 남의 자식과 나의 자식과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문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남의 작품을 보듯이 내 작품을 보고 남의 문학을 생각하듯이 내 문학을 생각했으면 얼마나 담담하고 서늘한 마음이 될 것인가. 그리고 문학이나 작품 자체로 보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좋은 것이 나올 것이다.

<사람이 돈을 따라다녀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아이들을 사랑할 때에도 통하는 말이다. 부모가 아이들을 너무 귀애하면 아이들은 오히려 성가시어서 한껏 짜증이나 내고 달아나 버린다.

(..중략...)

그렇다고 아이들의 사랑을 사기 위하여 일부러 무관심한 태도를 꾸며야 할 것인가 아니할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규정을 내리기 전에, 우선 문학의 경우에 있어서 이것을 생각해볼 때, 나는 한 가닥의 설운 마음을 금치 못한다. 문학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도의 우둔이랄까 그러한 것을 나는 죽을 때 까지 면하지 못할 것이고 보면, 나는 죽을 때까지 문학을 지니고 있는 한은 진정한 멋쟁이가 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중략...)

<사람이 돈을 따라서는 아니 된다>는 말을 앞서 인용하였는데 소위 처세상에 있어서, 즉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나는 이 원리를 이용하여 보는데 확실히 효과가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하게 되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보아 악마의 조소가 수시로 떠오르는 데는 세상에 대하여서나 나 자신에 대해서나 미안한 일이다. 하여간 악마의 작업을 통해서라도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은 나의 위치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역대의 모든 시인들이 한번씩은 해온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고독이나 절망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고독이나 절망이 용납되지 않는 생활이라도 그것이 오늘의 내가 처하고 있는 현실이라면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순수하고 남자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위도(緯度)에서 나는 나의 생활을 향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1955.10>

*위도(緯度):적도(赤道)에 평행(平行)하게 지구(地球)를 남북(南北)으로 재는 좌표(座標). 

『김수영 전집 2 - 산문』, <무제> 中 ,민음사, 이영준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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