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눈과 손가락만 남더라도,
사는데 지장없는 세상,
입과 귀는 없어져도 무방한 세상이 찾아왔다.
라고 생각하면 나는 천둥번개처럼 무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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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말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A의 감각이나 인지상태를 B가 받아내게 하는 감정의 말, A가 획득한 지식이나 사실관계 따위를 B에게도 전달하는 인식의 말. 두 말은 본디 하나였고 잘 구분되지 않아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적어도 옛날옛적 사람들은 감정의 말만큼은 크게 느꼈다고 전해진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무렵부터 말이 구분되기 시작한다. 부족사람들은 어떤 형상에 모두가 동의하는 뜻을 불어넣고 그것을 부족구성원만 아는 발음에 끼워맞춰 말하기 시작한다. 문자언어의 탄생이다. 눈과 손가락으로 건내는 말은 인식의 말을 실어 나르기에 적합하다. 문자언어를 쓰며 사람들은 인식의 말을 크게 키워냈다고 한다.
입과 귀를 파르르 유난히 잘 떠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감정의 말을 실어 나르는데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그들은 누구도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입과 귀를 파르르 떨며 세월을 보내왔다. 감정의 말과 인식의 말은 각자 담겨진 텃밭에서 쑥쑥 자란다.
지중해에서 인간을 닮은 신들을 섬겼던 어느 부족은 감정의 말을 파토스, 인식의 말을 로고스라 불렀고. 말의 결이 서로 다른 까닭에 벌어지는 일을 섬세하게 다루기 시작한다. 다른 부족도 '말의 결'에 호기심이 있었고 구분짓고 분류하며 말의 성격을 어렴풋이나마 알아챘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흘러 사람들은 드디어 말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성공했다. 우리는 인식의 말을 크게 키워내 문명을 일궜고, 특히 오늘날 문명이 빚어낸 통신기기는 너무나도 말을 실어나르기 탁월해서. 우리의 옛 선조들이 그랬듯, 새로운 말을 빚어낼지도 모른다.
다만 덕분에 말이 너무 많아져서 몸의 진화가 말의 진화를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일도 생길 거라고. 한 가지 말만 자주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건 젓가락질과 비슷할 거라고. 젓가락질에 서투르다고 젓가락질을 포기하면 꼬챙이로 푹 찍어 누르는 짓만 능숙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쓰는 말이 보기보다 허망하고 공허할지도 모른다고.
말이 갈 길을 훑을 순 있어도 말이 나아갈 길은 도통 모르겠다는 메모가 덧붙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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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을 자주 펼친다.
눈으로도 펼치고 입으로도 펼치고 귀로도 펼치고 손가락으로도 펼친다.
말을 많이 펼치는 나는 자주 실패한다. 실패한 말은 고통과 슬픔을 데리고 온다.
실패한 말을 주워담으면 항상 눈만 놀려 손가락으로 펼친 말이 나를 가장 아찔하게 만든다.
손가락만 거친 말은 자주 허망해져서 나는 요 근래 들어 손가락으로 펼친 말에 입도 보태고 귀도 보태는데, 그런다고 해서 말이 잇달아 성공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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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와 B가 있다. A와 B는 느슨한 관계망을 이루고 있다. 이 때 A-B의 네트워크가 내포한 가능성을 끝까지 탐사하지 못하고 좌절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서로 사용하는 말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나는 어긋나는 말의 균열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은 일단 물리적인 거리를 좁히는 일에 있다고 믿는다. (달리 뾰족한 수도 없지 않나?)
A와 B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를 좁히면, 각자 간직한 감정의 말을 건내받기 탁월해진다. 입과 입이 맞닿은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입에서 밀어낸 공기가 파르르 떨리면, 공기 팡~ 귀로 가닿는 감각이 뚜렷해지고, 뚜렷해진 감각으로 우리는 예전보다 신속,정확,명확하게 A와 B의 교집합을 포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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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년 간, 성공적이었고, 오래 간직해봄직할 만한 만남은 모두 물리적인 거리를 좁힌 채 어울린 만남, 그런 만남에서 싹튼 '말의 교접'이었다. 교접이란 단어를 굳이 써봤다. 사람마다 떠올리는 형상이 제각각일 텐데. 물리적인 거리를 좁힌 채 타인을 지긋이 응시하면, 나와 남이 남달리 쓰는 어휘를 즉시 조정할 수 있게 된다. 조정된 어휘는 말을 제법 잘 잇게 한다. 잘 이어진 말은 만남을 풍요롭게 한다. 풍요로운 만남에 행복이 깃들어 있다.
우리가 살면서 실패한 말에 속상해 하는 것은 말에 행복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행복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교류에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간접말고 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