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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를 쓰고 읽고 주고받는다.

by 정필년

부지깽이를 심어도 꽃이 필듯한 4월 초, 따순 아침. 나는 솔을 만나러 집을 나섰다. 요즘 중요한 취업 면접을 앞둔 나는 밤을 지새우며 상념에 빠져있는 시간이 늘었다. 잔에 담은 커피의 마지막 한 방울을 홀짝이며 문득 솔을 떠올린다.



솔은 다시 만난 건 햇수로 따지면 4년이나 흐르고 나서였다. 솔이는 내가 군화를 신기 전에 방송국 직원으로 뽑혀 상암으로 흘러갔고, 내가 예비군 편입신고를 하는 사이에 온 국민이 아는 프로그램을 연출한 4년 차 프로듀서가 되어 있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까다롭게 사람 뽑을 회사였으리라. 나는 솔이가 그 회사에 들어갔다고 했을 때, 숨 막히는 경쟁률을 뚫고 나온 생존자에게 드는 외경심보단, 마땅히 어울리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붙었다는 생각이 들어 외려 시큰둥했다.


상암동 골목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 솔은 사흘 전에 만난 친구를 보는 표정으로 내게 뛰어왔다. 나는 깃발처럼 팔목을 흔들었고 솔은 팔목 끝에 달린 내 솥뚜껑 손바닥을 향해 껑충 뛰어 손뼉을 쳤다. 솔은 솔이다. 누가 뭐래도 솔이다. 사람 만나면 가장 잘 반기는 사람, 내가 아닌 누구라도 정성껏 반기는 사람. 솔.

과 만난 곳은 솔이 상암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일본 요릿집 앞이었다. 솔이 권한 가정식 백반은 도정이 잘 된 밥과 맑은 조갯국과 해물 누룽지탕이 담겨 있었다. 오픈 키친에서 즉석에서 썰어낸 신선한 사시미를 내주는 가정식 백반은 처음이었다. 가정식이랍시고 나오는 냉동 가라아게 튀김을 먹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요리가 전해주는 감동에 젖어 수다를 천천히 이어간다. 여태 각자 뭘 했었는지, 요즘엔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떠들었다. 직장인의 점심시간은 왜 이리 짧은 걸까. 서로 지난 4년 간 뭘 했는지 얘기하는 것만으로 한 시간이 꼴딱 넘어가버렸다.




솔을 만나는 사람은 솔에게 곁을 내주고 싶어 할 것이다. 누구라도 기꺼이 곁을 내줄 것이다. 그건 솔이의 시간 감각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솔이 입을 열면 솔이가 내뱉는 문장의 시제는 늘 '지금, 여기'였다. 솔이가 옛 추억을 끄집어내면 흘러간 옛일에 집착하는 법이 없었다. 솔이 과거를 말하는 건 지금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였고 솔이 미래를 말하는 건 지금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솔아, 너는 면접 봤을 때 어떤 질문이 제일 기억에 남아?"

"나 회사 들어올 때?"

"응, 요즘 면접 보러 다니면서 느낀 건데, 값진 질문을 던져주는 회사에 정이 가더라"

"음... 나는... 아! 이런 질문이었어. 세상에 당신 홀로만 남는다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거다?"

"아니 이~흐흐흐흐... 당신과 딱 한 명만 세상에 남을 수 있다. 누구와 남을 것인가? 근데 질문이 돌면서 나올만한 대답은 다 나왔었어."

"애인, 부모님 같은 거?"

"응."

"너는 뭐라고 답했는데?"

"난 '이 중에 계신 면접관님들 중 한 명'이라고 했어."

"와..."

"나는 그때, 면접관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가 너무 궁금했었어."


솔은 늘 마주한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고, 솔은 나를 바라본다. 솔의 눈은 호기심이 가득한 아이의 눈망울처럼 깊었다. 만약 솔이의 딱 한 가지를 카피해 내 몸에 옮길 수만 있다면, 솔의 눈을 닮고 싶다고 나는 생각했다.




솔을 만나는 사람은 이따금 길 한가운데 멈춰 엉뚱한 일을 시작하게 될 거다. 누구라도 이 느닷 없는 일에 기꺼이 따르게 될 것이다. 부지깽이를 심어도 꽃이 필듯한 햇살은 우리가 점심을 다 먹고 나서도 꾸준히 이어졌다. 솔이 가장 좋아한다는 카페로 가고 있는데 길 어딘가에서 풀냄새가 솔이 코와 내 코에 확 들어왔다. 맑고 묽게 느껴지는 향기를 쫓아 코를 킁킁대니 꽃집이 보였다. 꽃집에서 내놓은 화분은 도로를 흠뻑 적시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촉촉하며 제일 예쁜 꽃을 피운 건 수국 화분이었다. 솔은 수국을 자꾸 들었다 놨다. 솔이 들었다 놓는 수국의 색은 솔이 입은 옷과 똑같았다. 어떤 수국은 솔이 입은 체리블라썸 플레어 롱스커트 같았고 어떤 수국은 솔이 걸친 밝은 연청 재킷 같았다.


우리는 어느새 목적지를 까맣게 잊고 수국 화분을 기르기로 정했다. 솔은 분홍색 수국을 골랐다. 풍선처럼 생겨서 풍선이라고 부르겠단다. 이름 짓는 재주가 없는 나는 솔에게 작명을 부탁했다. 솔은 내가 고른 파란 수국이 목이 길다며 기린이라 불렀다.




헤어질 때쯤, 솔이 새로운 이름을 짓는다.


"나 또 생각났어! 목이 길어 타조. 타조 하면 또치, 또치는 어때?"


하지만 나는 기린이 좋다.


"안 돼. 얘는 기린이야."


솔은 나를 부를 때 이름에 '쓰'를 붙인다. 그러니 기린에 기린쓰. 이것이 솔이 한참을 들었다 놓은 푸른 수국의 이름이다. 이름을 정했으면 성도 정해야지. 패밀리 네임을 '또치'로 쓰자. 그래. '또치'는 된 발음이 많아 어감이 강하니까 부드럽게 doche는 어떨까.


'기린쓰 도체'Girinth Doche. 아프리카나 남미 어딘가의 축구선수 같기도 하고, 알려지지 않은 식물의 학명 같기도 하다. 나는 엉뚱하게 만나 엉뚱하게 이름 붙인 수국을 엉뚱하게 기르게 됐다.


아이 참. 엉뚱하다. 솔을 만나면 이다지도 엉뚱해진다.



"쓰! 나 예전에 심리학 에디터 했을 때 아티클 기억나?"

"뭐였지?"

"자세 말이야. 원더우먼 자세를 할 때나 만세 할 때 마음이 그냥 움츠러든 자세일 때 사람 심리가 다르다고"

"오! 그랬었나?"

"면접 같은 거 보기 전에, 세면대 거울 앞에서 원더우먼 자세로 오분 정도 서있다가 면접장에 들어가 봐."

"!!! !!!"


솔의 면접 꿀팁을 깜빡 잊을 뻔했다. 모든 취준생은 면접 직전 긍지와 패기를 담아 원더우먼 자세 5분 실시!




신청해두면 메일로 금요일 오후 쯤, 좋은 인터뷰와 아티클 큐레이션이 날아온다.

1.

나는 얼마 전 북저널리즘 새터데이 에디션에서 아주 인상 깊은 문답에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독은 이쪽. https://www.bookjournalism.com/user/signup
Q. 지금, 깊이 읽어야 할 것을 추천해 달라.
A. 자신의 소중한 친구들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고, 그 친구들이 생각하는 나에 대해 깊이 이야기하는 것도 일종의 콘텐츠다.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회사가 급하게 성장하다 보니 힘들 때가 있었는데, 가족보다도 친구들에게 많은 위안을 받았다. 내가 어떤 꿈을 갖고 살아온 사람인지 알아주는 친구들에 대해 깊이 알수록 스스로도 깊어지는 것 같다.

- 북저널리즘 새터데이 에디션 99호, “상식을 상식으로 만드는 혁신” - 윤소연 아파트멘터리 대표 인터뷰 中




지금, 깊이 읽어야 할 것을 추천해달라고 하는데, 책이 아니라 '사람'을 읽으라고 한다. 특히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를 읽으라는 주문은 나 같은 '라쇼모니스트'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몬>에 백점천점만점을 주는 사람들을 이르는 필자의 신조어.人生事 라쇼몬. 관점과 입장에 따른 오해는 인간의 숙명임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려 애쓰는 사람들.) 에게 커다란 영감을 줬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과 얽혔던 순간을 제 나름대로 기록하고, 그것을 다양한 형태로 가공해 공유하는 작업.


그것이 어쩌면 한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인사이트를 전달한다는 견해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게 됐다


2.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직접 해내면 훨씬 낫겠지.


오늘은 멀리 두고 오래 사귄 벗을 잠시 만났다. 방송가 일이 늘 그렇듯, 일이 바빠 근처에 들러도, 약속을 잡아도 일정이 바뀌기에 볼 수 없던 친구였다. 상술한 대로 기억할만한 마주침이었고, 내가 생각하는 친구에 대해 깊이 헤아려보기 위해 타이핑을 시작한다

반짝반짝 대낮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쓰기 시작하는데
IMG_20190407_035654_889.jpg 해가 지고 달이 차오르는 미드나잇.


퍼스펙티브를 색다르게 놓고 싶어, 소설처럼 써보려 애쓰다 보니 평소보다 조금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괜찮다.


내가 어떤 꿈을 갖고 살아가는지 알아주는 친구들이라면 얼마든지 이런 작업을 해낼 수 있겠다고. 서로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한다면 적극적으로 제안해보자고.


굳게,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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