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보면, 걸은 만큼은 답을 얻을 수 있다고.
walk는 work라 오해받곤 하지만, 걷기는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지 않는다. 편한 신발 신고 목을 적실 마실거리를 챙기면 오히려 소모된 기력을 북돋기 좋다. 여기에 걷기 파트너가 있다면 효과는 두 배. 그래서 요즘엔 매일 걷는다. 대구에서도 걷고 집에 돌아와서도 걷고 여하간 많이 걸어두려 한다. 하정우처럼 하루에 40km씩은 무리여도(40km면 서울 상암에서 잠실 올림픽공원은 너끈할거다.) 10km정도는 걸어두려 애쓴다.10km에 걸리는 시간은 대략 두시간이니, 이정도면 어렵지 않게 투자가능한 시간이지 않을까.
"아오 콱 그냥! 내가 <나의 아저씨>보라 그랬지? 나는 니 씨티팝 추천해준 거 듣는데 하여튼...말 존나게 안들어요"
"1화 10분 봤음...ㅇㅇ 야! 근데 <아는 형님>보니까 그 드라마에 오나라 배우 나오던데 무슨 역할이냐?"
"어...그 드라마에서 스님이 나오는데..."
나는 걸으면서 대화하는 걸 무척 좋아하는데, 가장 발과 입을 자주 맞춰온(헉...한국어로 쓰니까 좀 야한디) 파트너는 동네친구 CBY다. 약자로 쓰니 발음이 어째 '씨바이'가 되는데 발음이 찰지니까 그대로 써보도록 하자. 아무튼 씨바이랑은 걸으면서 엉뚱한 테마로 문답을 나누기 일쑤다.
"야. 너네 부모님은 어떻게 만나셔서 결혼했는지 너는 아니?"
"우리는 아브지가 사춘기때 까정 전라도에 있다 인천에 공장에서 일하는 누나랑 같이 살면서 정착했다지? 근데 울 어무이가 원래 간호사셨는데 아부지가 병문안 갔다 반해버린 거여. 처음에는 어무이가 아부지 맘에 안 들어서 거절했다는디 울 아브지가 병원 앞 다방에서 올 때까지 기다릴랑게 그렇게 아시라구. 밀어붙였다는 거여. 어무이가 퇴근하고도 세 시간 쯤 지났나? 설마 싶어서 나갔는데 그 때 까지도 다방에 있었다더라고. 그렇게 만나기 시작했고 그러다 누나랑 나까지 낳게 되어분거지."
"크...연애결혼이시구만!"
"근데 울 어무이는 가끔 내가 그 때 느이 아브지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러신다 농으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씨바이의 에피소드는 듣는 것도 재미나지만 , 부모님이 하셨다는 농담이 킬링파트다. 우리 집에도 이따금 떠도는 농담이기도 하며, 누군가와 짝지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게 되는 가설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을 만났다면, 혹은 만나지 않았다면 이뤄졌을 사건사고에 대한 상상. 관계의 연속과 단절. 인연의 질과 양을 재료로 삼는 아찔한 상상.
자식된 입장에서 "만약에 어땠을까"를 품고 부모님의 인연을 역추적하니 아찔하기 그지 없다. 부모님의 첫만남과 중간과정이 하나라도 삐끗했다면, '나'라는 생명이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니. 스물 여덟의 처녀와 서른 셋의 총각이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다, 맞선이라는 원-코인-찬스를 꾸준히 이어가다니. 양 측 다 결혼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있었고, 양 측 다 결혼을 원했고. 부부의 첫날밤 허니문 베이비가 하필 '나'라니.
나 못지 않게 우여곡절이 많았을 씨바이와 30년이나 같은 동네에서 살다 이렇게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있다니. 디스 이스 어썸. 이렇게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만남과 인연은 미리 짜여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하다.
나는 당분간 친구들을 만나면, 부모님의 만남을 넌지시 물어보고자 한다. 아버지가 사실은 80년대 강변가요제 출전 가수셨다거나...어머니가 동네청년 모두가 러브레터를 지어다 바치는 미인이라거나... 두 분이 고향도 아닌 제 3지역에서 만나 서로 사귀었고...교제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대한 사연을 접수하면, 어머니 아버지가 수십년 뒤에 내 눈 앞에서 도란도란 수다떠는 사람을 빚어주셨다는 사실에 괜히 감격하게 된다.
사연을 포개는 문답에서 상대방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할 역사적 맥락을 얻는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상에 출현했지만, 우리를 세상에 출현시킨 이들의 의지를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나의 역사가 어디로 나아가야할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우리 만남의 흐름도 어느정도 간파할 수 있는 거 아닐까.
3.
실존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은 내던져진 (피투 된)존재'라고 떠들었다지. 처음엔 이 땅에 내동댕이쳐졌지만, 시간이 흐르면 내동댕이치는 입장이 될 것이라고. 실존주의가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대인의 삶은 수동과 능동이 이리저리 엮는데서 건축되는 거겠지.
요즈음의 나는 누구와 능동하고 수동하나. 전화받으면 가족의 끼니해결부터 확인하는 어머니와는? 언제 어디서든 조급해하지 말고 기죽지 말라는 멘트를 힘주어 해내는 아버지와는? "왔냐?뚱땡아?!" 하면 "어~비융신아~"하고 받아치는 동생과는?
어디까지 능동적이여야하고, 어디까지 수동적이여야 할지. 너무 막막하고 어렵다. 능동과 수동을 정확하게 해내는 건 아마 죽을 때까지 못해낼 것 같다.
"허나 걷다 보면, 걸은 만큼은 답을 얻을 수 있다고." 그렇게 믿으며 꾸준히 걸어보려 한다. 자주 때때로 동반자를 데리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