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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필년 Aug 20. 2020

코로나 시대의 탐미주의자

일상의 소설적 재현시도 <3>


호야킨 소로야라는 화가를 알게 됐다 빛에 반사된 색을 잘 포착하는 작가다. 특히 흰색
인상파 그림 별 감흥 없었는데 되게 오래 들여다본다. 미감이 조금씩 변하는 걸 느끼는 요즈음.

1.

집안에만 머물렀던 하루였다. 노트북과 무선 네트워크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나는 종종 재택근무를 펼친다. 사내 메신저에 출근 알람을 알리고 내내 책상 맡에 머물렀는데, 시계는 벌써 밤 11시를 알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식구들은 덥다고 난리다. 허나 낮이 밤이 되는지도 모르고 모니터만 바라보던 나는 바깥공기가 무척 궁금해지던 터였다.

때 마침 타이밍 좋게 걸려온 동네 친구 나그네 씨의 전화. 저녁을 배부르게 먹어 산책이 필요하다고. 나오라고. 그가 날 부르지 않았으면, 분명 열두 시에 노트북을 엎고 대충 침대 위에서 스마트폰이나 만지다 잠들었겠지. 비슷한 루틴을 갖고 사는 친구가 곁에 있으면, 이렇게 심약(?)해지는 순간을 구원해준다. 나그네 씨와 동네 어귀를 삼십 분 정도 나란히 걸었다.

2.
이제 막 시작된 2020년의 여름밤은 제법 선선했다. 눅눅하지 않고, 덥지도 않은 바람이 아주 조금 부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조용하다. 익숙한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일하며 엉킨 생각과 마음을 쓰다듬었다.

3.
차분해진 마음에는 '미'가 깃든다.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능력이 커진다. 건물 콘크리트의 곰삭은 질감을, 가로등의 노르스름한 빛을, 문을 닫은 가게 유리 편 너머의 오브제를 더 섬세하게 느낄 수 있다. 마음에 아름다움이 깃들면, 긴장을 풀고 옅은 미소를 띤 채 하루를 보낼 수 있다.

한 편으로는 이런 탐미주의 성향이 요즘 같은 시대에 지속 가능한 건가 싶은 의심도 싹튼다. 당장 내일 세상을 떠난다 해도, 나는 오늘처럼 숨 쉴만한 곳으로 나아가 하루라도 더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려 애쓸 텐데. 삶의 근거를 뒤흔드는 일이 생겨도 나는 나의 습관, 나의 욕망을 지켜낼 수 있을까. 참고 인내해서 더 많은 금전적 여유와 넉넉한 시간을 확보해서 더 큰 감흥을 유도하는 편이 나은 걸까.

내가 요즘 제일 바라는 것. 마음 맞는 사람이랑 좋은 빛과 색을 온전히 누리는 시공간. 그런 시공간에서 싹트는 상호신뢰. 그 모든 것을 구성하는 건 사회의 물리적인 후원에 기반한다

4.
아름다움을 더 크게 누리는데 가장 든든한 벗은 다름 아닌 자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요즈음. 나는 어떤 대상의 백개 천 개가 해롭다 해도, 단 하나의 아름다움이 마땅하면 그것을 취하려 드는 사람이다. 아름다움을 삶에서 따돌릴 수 없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잠시 외면해야 아름다움에 필요한 자본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을지 않을까. 어떤 의심. 혹은 모순.(일종의 자가진단이다.)

당분간 세상은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자본을 불리기에 적합한 판으로 돌아가는 듯싶다. 시중에 풀린 돈은 많고, 종합주가지수가 오른다. 좋은 걸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판단에 미래를 걸기 좋은 시절이다.


반대로 가진 게 오늘과 내일밖에 없는 사람들, 한 달과 내년을 계획하기에 오늘과 내일이 위태로운 사람들은 어쩌면 좋을까.


미래의 가능성을 자본으로 변신시키기에 많은 육체노동과 가치 증명을 요구받는 무자본 사회초년생에게 불리한데, 지속가능한 시스템 구축을 고민하지 않고, 탐미주의를 끌고 가는 게 가당키나 한가.


지금은 다리하나 걸치고 있지만, 내가 머무르고 싶은 곳은 결국 문화예술계. VR과 영상 콘텐츠도 대단한 성장을 일궈내고 있지만, 문화예술이 위대한 건 물리적 실감이다. 대단한 걸 마주했을 때 느끼는 경이로움, 감동, 희열.


대면접촉이 중요한 문화예술계는 코로나 19로 인해 위축과 성장을 불규칙하게 반복하지 않을까. 수축과 팽창 사이에서 신경증을 앓지 않고 담대하게 심미안을 길러나갈 수 있을 것인가. 코로나 시대에 아름다움을 열망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을지. 당분간 계속 이어갈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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